신흥동(新興洞)은 글자 그대로 '광복을 맞아 새롭게 발전하고 부흥하자'라는 뜻에서 그 이름을 얻었다. 광복 전에도 그곳은 이미 인천의 대표적인 부촌이었다. 1920년대 일본인들이 문화주택이라고 불렀던 집들을 이곳에 많이 지었다. 그 중에는 인천부윤(현 인천시장)이 사용했던 관사가 있다. 송학동에 관사(현 인천시역사자료관)를 마련하기 전 1966년까지 시장 관사로 사용된 전형적인 왜색풍의 저택이다. 고위 관료들이 그곳에 많이 살았기 때문에 풍채 좋은 집들이 시장 관사와 이웃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곳을 '관사마을'이라고도 불렀다.

동네 사람들은 6·25 전쟁 때 답동성당 덕분에 이 마을이 온전히 살아남았다고 말하곤 했다. 맥아더 장군이 십자가 달린 큰 성당 쪽으로는 함포 사격을 하지 말라고 했다나. 전쟁에서도 살아남은 이 관사마을이 최근 폭격을 제대로 맞은 듯하다. 재개발에 들어가 많은 집들이 철거 중이다.

이 대목에서 '판타지' 모드가 작동한다. 불도저로 뒤엎다가 어느 집 마당에서 보물이 '발굴'될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해본다. 패망하고 조선에 살던 일본인들이 귀국할 때 미군정은 현금 1000원과 보따리 몇 개만을 소지하는 것을 허용했다. 불법으로 소형 선박을 마련해 재산을 다 싣고 야반도주하다가 인천부두국 감시원에게 적발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가져가지 못 할 바에는 어떻게 할까. 평소 친분 있는 조선인에게 맡겨 놓거나(그들은 다시 돌아올 것을 확신했다) 울며겨자먹기로 그냥 건넸을 것이다. 그것도 아니면 자기 집 은밀한 곳에 꽁꽁 숨겨놓았을 것이다. 신흥동 주택은 비록 적산(敵産)이지만 이미 우리와 오랫동안 아픈 기억을 함께 해온 집들로 이른바 '네거티브 헤리티지'다. 그곳에서 보물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진짜 '보물'을 잃어버릴 지도 모른다.


/전 굿모닝인천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