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항 1·8부두 유네스코 등재 추진위
교수·사학자 등 발기인 30여명 모여
▲ 18일 인천 중구 하버파크호텔에서 열린 '인천 내항 1·8부두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위원회' 발기인 모임 참가자들의 기념촬영 모습. /이주영 기자 leejy96@incheonilbo.com

 

▲ 인천 내항 계선주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붉은색 원). /사진제공=화도진도서관

 

▲ 과거 인천항 제1부두의 모습. /사진제공=화도진도서관


인천개항의 뿌리이자 격동의 한국사를 고스란히 담은 '인천내항 1·8부두'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하기 위한 시민들의 자발적 움직임이 첫 발을 뗐다.

인천지역 교수와 향토사학자, 화가, 시민단체 등 시민 30여명은 18일 중구 하버파크호텔에서 '인천내항 1·8부두 유네스코 문화유산등재 추진위원회'(추진위) 발기인 모임을 가졌다. 이날 모임에는 조용만 인문학네트워크 대표를 비롯해 이희환 인천도시공공성네트워크 대표, 최정철 인하대 교수, 고제민 화백, 양진채 소설가, 박상문 전 인천지속가능발전협의회 회장, 유동현 전 굿모닝인천 편집장 등이 참여했다.

추진위는 인천내항의 상징성에 주목하고 있다. 개항 후 인천내항에서 벌어진 각종 사건이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수간만의 차가 심한 내항은 효과적인 하역을 위해 1906년부터 근대식 항구시설로 탈바꿈했다. 1911년 착공한 인천항 갑문이 1918년 완공됐고, 1914년 인천감리서에 투옥된 김구 선생이 인천항 석축을 쌓는 노역에 동원됐다. 당시 축조된 부두 벽체와 사용한 계선주(배 정박 때 줄을 거는 쇠고리) 등이 1부두에 남아 있다. 아트플랫폼의 인천생활문화센터 칠통마당 명칭에서 옛 내항 1·8부두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인천내항은 확장 공사를 이어가 1974년 동양 최대 갑문이 생기면서 우리나라 수출·입 1번지로 자리매김했다.

추진위는 또 디아스포라(이민)를 결심할 수밖에 없던 한국인들이 내항에서 1902년 한국 최초 이민선 겐카이호를 탔던 역사성을 강조했다. 이후 1905년 일본의 제지로 미국으로의 한인 이민이 중단되기까지 총 7226명의 한인들이 하와이에 도착했다. 이민자들은 힘든 노동의 삶에도 조국 독립을 위해 독립자금 모금 등에 앞장섰고, 광복 후 학교 설립 등 사회복지사업도 벌였다.

부산은 이미 북항 1부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움직임을 본격화했다. 추진위는 부산이 벌인 관련 연구용역을 수집하고, 부산지역 전문가를 초청해 의견 청취에 나설 계획이다.

최정철 교수는 "개항부터 지금껏 한국의 근·현대사를 고스란히 품고 있는 내항 1·8부두를 개방과 연계해 더욱 보존하고 가꾸기 위해서는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부는 항 기능이 축소된 내항 1·8부두를 시민에게 개방하고 이 곳에 상상플랫폼과 수변공원, 원도심 개항장 등 체험형 해양·역사·문화관광지구할 방침이다.

/이주영 기자 leejy96@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