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희 인천대 중국학술원 교수

일제강점기 인천을 대표하는 중화요리점은 어디였을까? 공화춘이라고 대답하는 독자가 많을 것이다. 아니다. 현대까지 존속한 인천의 대표적인 고급 중화요리점은 세 곳 있었다. 중화루, 동흥루, 공화춘.
이 가운데 가장 먼저 설립된 것은 동흥루로 1911년이다. 공화춘이 1912년, 중화루는 1915년이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설립됐다.

공화춘의 설립자는 화교 우희광(于希光)이며, 중화루는 화교 뇌문조(賴文藻)였다. 동흥루는 분명하지 않지만 1935년의 경영자는 화교 서문당(徐文堂)이었다. 그런데 설립자 및 경영자 3명은 모두 산둥성 출신이며, 공교롭게도 복산(福山) 출신이다. 복산은 현재의 연태시에 속하는 지역으로 산둥요리의 고향으로 불리는 곳이다. 1960년대까지 서울 최고의 중화요리점으로 이름을 날린 아서원의 설립자 서광빈도 바로 복산 출신이었다.

공화춘의 소재지는 현재의 짜장면박물관 자리였다. 1935년 당시 공화춘은 72.5평의 대지에 2층 벽돌조적 건축물로 48칸이었다. 당시의 부동산 가격은 1만2000원이었다. 동흥루는 현재의 중구생활사전시관 자리의 맞은편에 있었는데, 150평의 대지에 3층 건축물로 방의 칸수는 65칸이었다. 1935년 당시의 부동산 가격은 1만5000원으로 공화춘에 비해 약간 비쌌다. 중화루는 구 대불호텔, 현 중구생활사전시관 자리에서 영업을 했다. 중화루 건물은 66평 대지의 3층 건물로 방의 칸수는 54칸이었다. 1935년 당시 부동산 가격은 3만3000원으로 공화춘과 동흥루보다 2배나 높았다. 인천화교 소유 부동산 가운데 최고가였다. 자본금도 중화루가 가장 많았다. 공화춘은 5천원, 동흥루는 6천원인데 비해 중화루는 1만6천원에 달했다. 1942년의 종업원 수는 공화춘이 14명, 동흥루가 22명, 중화루는 25명이었다.

이러한 모든 사실을 놓고 볼 때, 중화루가 규모면이나 자본면에서 인천 최고의 중화요리점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공화춘은 기존의 건물을 잘 보수하여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을 뿐 아니라 짜장면박물관으로 잘 활용하고 있다. 중화루는 영업부진으로 1970년 초 문을 닫고 1970년대 후반 호텔을 짓기 위해 건물을 철거했다. 중구청이 중화루 건물을 복원하여 2018년 4월 중구생활사전시관으로 활용하고 있지만, 대불호텔과 중화루의 역사성을 제대로 살려냈는지에 대해서는 비판의 목소리가 적지 않다.
다행히 인천시립박물관이 중화루의 간판과 실내에 걸려있던 편액을 일부 보존하고 있다. 간판은 중화루 정문 입구에 걸려있던 것이다. 직사각형의 이 간판은 1922년 음력 2월에 제작된 것으로 '中華樓'(중화루)의 글자를 쓴 인물은 부배동(傅培桐)이었다. 그는 1920년대 인천중화상회의 회장을 지낸 인천을 대표하는 화교상인이었다. 또 하나의 간판은 삼각형 모양으로 되어 있다. 왼쪽과 오른쪽에 용이 그려져 있고 그 가운데에 '新'(신)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다. '新'의 글자 아래에는 '中'(중)의 글자가 쇠에 박혀 있다. 이것은 중화요리점의 '中'을 의미한다.

그런데 왜 이 글자 위에 글자 '新'이 덮여있는 것일까. 중화루의 경영자는 해방 이전까지 창업자 뇌문조에 이어 그의 아들 뇌성구(賴盛久)가 맡았다. 해방 이후는 경영자가 화교 서덕유(徐悳有)로 바뀌었다. 서덕유가 새로운 경영자로 취임하면서 '新'을 넣은 것이 아닐까 한다. 간판 이외에 실내에 걸려있던 편액도 있다. '春光和靄'(춘광화애)의 편액도 부배동이 쓴 것이며, 간판과 같은 1922년 음력 2월 제작됐다. '봄날의 따스한 햇볕, 넘쳐흐르는 부드러운(즐거운) 기운'이라는 뜻이다.

간판과 편액의 제작이 모두 1922년 음력 2월이라는 것은 중화루가 이때 구 대불호텔에서 확장 개업한 것을 보여준다. 1915년 설립은 소형 중화요리점으로 시작하다 1922년에 구 대불호텔 건물로 옮긴 것이다. '把酒淫風'(파주음풍)의 편액도 1922년 음력 2월에 제작된 것인데 글 쓴 인물은 산둥성 육려 출신의 화교였다. '술잔을 들어 마시니 음란한 분위기가 가득하구나'라는 뜻이다. 일제강점기 고급 중화요리점은 요정 역할도 했기 때문에 그러한 분위기를 잘 드러내 주는 편액이라 할 수 있다. 이외에도 2점의 편액이 더 있다.
이러한 간판과 편액의 배경에는 다양한 문양과 상형글자가 그려져 있어 100년 전의 예술작품을 접하는 느낌이다. 중화루의 역사성을 살려내기에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문화재로 하루빨리 지정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