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

수일 전 지인의 사무실엘 갔다가 진풍경을 만났다. 이름만 걸어놓은 이사진들이 각자 인감증명서와 주민등록초본, 인감도장을 준비하고 속속 모여들었다. 법무사 사무실에서 나온 직원이 여기저기에 인감을 찍고 서류들을 챙겼다. 알고보니 이사 1명을 교체하는 작업이었다. 상시 직원 5명의 소기업이다. "이런 일을 직접 하다가는 열불이 나 아예 법무사에 맡겼다"고 했다. 전에 없던 공증절차까지 추가 돼 더 까다로워졌다는 것이다.
지난 달 중순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에서 '중소 기업 규제혁신 및 기업 속풀이 대토론회'가 열렸다. 중소기업 옴부즈맨(차관급)과 행안부장관 등 공무원 10여명이 단상에 올랐다. 각자 묵직한 해머를 들고 힘껏 내리쳤다. '현실괴리 중소기업 규제애로'라 적힌 블록들이 박살났다. 모두 웃으며 손뼉을 쳤다. 그러나 이어진 '속풀이 토론회'의 풍경은 다르게 흘러갔다.

#고구마라떼는 난개발 우려로 농장서 팔면 안 돼
인천 강화에서 고구마 농사를 하는 사람이 손을 들었다. 농장에서 고구마라떼나 고구마수프도 팔고 싶지만 규제에 막혀 있다고 했다. 정부측 답변은 이랬다. 그러려면 휴게음식점 허가를 내야 하지만 농촌 난개발이 우려된다. 고구마라떼를 공짜로 제공하는 것은 괜찮다. 또 다른 규제 하소연에 대해서는 "00부가 법을 바꿔주면 긍정검토하겠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지난 해 2월 경기도에서는 31개 시·군이 참가하는 '규제혁파 경진대회'가 열렸다. 이날 행사에 걸린 상금만도 300억원이다. 우수 시·군에 대한 특별교부금 배정과 본선 진출팀에 대한 포상금이다. 국민들을 옥죄는 첩첩의 규제를 풀기 위해 다시 국민 세금을 퍼붓는 이벤트였다. 지금쯤 경기도는 '규제 프리존'이 돼야 맞다. 하지만 아직 그런 얘기까진 못들었다.

#'철통규제 박람회' 열어 격려해주면 달라질까
'한국 규제'는 외국에서도 소문난 모양이다. "규제가 한국기업의 경쟁력인 '속도'를 다 까먹고 있다." "한국의 법령은 공무원이 해석하기 나름" 등등.
'한국 규제' 앞에서는 제왕적 대통령제도 소용없다. YS는 행정개혁쇄신위원회를 만들고 DJ는 "단두대라도 동원하라"고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규제 총량제', 이명박 전 대통령은 '규제 전봇대 뽑기', 박근혜 전 대통령은 '손톱 밑의 가시'를 내걸었다. 문재인 대통령도 취임 초부터 "붉은 깃발을 치우자"고 했다.

#우리네 의식 속 '규제만능'도 문제
규제혁파든, 규제개혁이든, 규제철폐든 이제는 고장난 축음기처럼 들리게 됐다. 과거 아무 생각도 느낌도 없이 외치던 '반공 방첩'을 닮았다. 게임 '리니지'와 '바람의 나라' 개발자가 토로했다. "규제, 이젠 그러려니 한다. 한국에선 숙명이다."
국민들도 그러려니 한다. 전국에 규제관련 위원회가 수백개는 될 것이다. 카메라 앞에서 온갖 퍼포먼스도 벌어진다. 경진대회도 잇따른다. 그러나 그 뿐이다. 차라리 '철통규제 박람회' 같은 걸 열어 오히려 격려해 주면 좀 달라질까.
공무원들만 탓할 게 아닌지도 모른다. 목소리 큰 정치권이나 언론, 시민단체들부터 보자. 무슨 일만 나면 '(당국이) 손을 놓고 있다' '강건너 불보듯 한다' '뿌리를 뽑아야'라며 몰아붙인다. 내가 공무원이라도 '얼씨구나' 할 것같다. 법안·조례 발의 건수를 경쟁시키는 것도 더 세심한 규제 보태기로 돌아온다. 우리네 의식 속 '규제만능'도 문제다.

#그 규제가 우리 청년들을 울리고 있다면
기업인들이야 '그러려니'하면 속이나 편할 것이다. 문제는 갈 곳 없어 떠도는 우리 청년들이다. 지난해 대기업들의 투자가 십수조원이나 줄었다고 한다. 그들의 사업능력 탓도 있겠지만 그 절반 이상은 규제에 막혔다고 봐야 한다. 그 돈을 우리 청년들의 일자리로 환산해 보면 아깝지 않은가. 올들어 인천에서 백화점 두 곳이 문을 닫았다. 시장 점유율 규제 때문이다. 그 한곳에서만 협력업체 일자리 1000여개가 날아갔다. 대부분이 인천 사람일 것이다. 오라는 데가 너무 많아 고민이라는 일본청년들은 무슨 복을 타고 났는가.
서로가 서로를 철삿줄로 두손 두발을 꽁꽁 묶고서 제자리 뜀을 뛰느라 구슬 땀을 흘린다. 규제공화국 한국의 자화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