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마다 심어둔 씨앗에 … '정'이 피었습니다
▲ 박경석 장인이 꽃이 만발한 나뭇가지를 잡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 퇴임하며 박경석 장인이 받은 표창장

 

▲ 경찰 정복을 입은 박경석 장인.

 

 

견학자 많고 이웃간 벽 허물고자
마을 어귀부터 정몽주 사당까지
수년째 화단 가꾸며 수확물 나눔

26년간 경찰직 정년퇴임한 뒤
교단서 생활법률상식 가르치며
민원 해결·청소년 품행관리도



완연한 봄기운에 산으로 들로 꽃구경 간다지만 치열한 전장 위를 거니는 현대인들에겐 꽃은 그저 사치일 뿐, 그러다 우연히 문 밖을 나설 때 내 집 화단에 누군가 심어놓은 꽃 한 송이가 절로 기분을 좋게 만들 때가 있다. 온정이 오가는 지역 사회를 만들기 위해 꽃을 심는 우리 동네 골목길 정원사 '마을 가꾸기의 달인'을 용인에서 찾았다. 열세 번째 발견 박경석 장인을 소개한다.

#꽃보다 정(情)을 나누는 골목길 정원사

박경석 장인의 하루는 집 앞 화단에 물을 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겨우내 웅크리고 있던 새싹들이 날이 풀리면서 하나, 둘 피어나기 시작하는 이 맘 때가 박 장인이 가장 바삐 움직이는 시기다. 그는 마을의 어귀부터 포은 정몽주 선생의 묘가 있는 사당까지 주택 단지 주변으로 수년째 화단을 가꿔오고 있다. 정년퇴임을 앞두고 남은 여생을 보낼 요량으로 15년 전 이곳 용인으로 내려와 둥지를 틀게 된 그가 화단을 가꾸게 된 데에는 특별한 사연이 있다.

"우리 마을에는 아시다시피 포은 정몽주 선생을 모시는 사당이 있습니다. 인근에 사는 많은 이들이 견학차 이곳을 들립니다. 이 사당을 가기 위해선 반드시 주택 단지를 지나치는데 그럴 때마다 우리 마을이 좋은 인상으로 남았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죠. 당장에 내 집 앞 화단으로 달려가 꽃을 심었습니다."
사실 박 장인이 화단을 가꾸기 시작한 것엔 또 다른 의도가 숨겨져 있었다.

"제가 이곳에 올 당시 만해도 주로 노인들이 살고 있는 동네였죠. 그러던 중 천정부지로 치솟는 집값에 퍽퍽한 서울 살이에 지친 젊은 세대가 이 마을로 이사를 오게 됐고, 자연스럽게 신세대와 구세대가 나란히 살아가는 마을이 형성됐죠. 단절된 채 지내는 세대 간의 모습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고, 예전 우리네 모습처럼 삭막한 이웃 간의 벽을 허물기 위해 꽃을 심게 됐습니다. 꽃을 보는 것만으로도 얼어있던 마음을 녹일 수 있을 거라는 확신에서 시작한 일이었죠."

꽃을 심자 그의 바람대로 굳어있던 이웃들 얼굴에는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개화 시기별로 모종을 심어 사계절 소식을 제일 먼저 전한다든지, 상추나 콩을 심어 수확한 작물들을 이웃들에게 나눠주면서 웃는 얼굴을 한 이웃들을 마주하는 일도 박 장인이 가꾼 화단에서부터 벌어진 변화였다. 한 날은, 방범의 우려 때문에 쉽게 창문을 열지 못하는 1층에 사는 주민을 위해 가지와 잎사귀가 많은 나무를 창가에 심어 두기도 했다.

"누가 시킨 것은 아니지만 사람 사는 정이 있는 마을이었으면 좋겠기에 벌인 일이었고 워낙 화단이나 화초 가꾸는 것을 즐겨 취미 삼아 시작한 일이었습니다. 제가 그리던 퇴임 후의 모습은 그저 술이나 먹고 화투를 치거나 부동산에 가서 하염없이 시간을 때우는 모습이 아니었기에 지금 제가 하는 화단 가꾸는 일이 결코 마을 사람들만을 위한 일은 아니었을 겁니다. 저 자신에게도 뜻깊은 일입니다."

#팔방미인, 우리 동네 보안관

남다른 의협심으로 이웃 사랑을 몸소 실천해 온 박 장인의 전직은 놀랍게도 경찰 공무원이다. 1980년에 경찰 시험을 치른 뒤 인천 지역에서 공직 생활을 시작한 그는 퇴임하는 순간까지 누구보다 솔선수범하며 헌신하는 삶을 살아온 인물이다. 말단 순경으로 시작해 경감의 자리까지 올랐던 박 장인은 현재 26년간의 공직 생활을 마감하고 인생 삼모작을 일궈가는 중이다.

"경찰 재직 당시에는 주로 국유 재산 관리나, 보급품, 장비 담당 업무를 해왔습니다. 저의 행동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몸이 불편한 주민들을 보고 지나치는 법이 없었고 기어코 경찰차로 댁까지 모셔다 드려야 직성이 풀렸습니다. 그때의 습관들이 아직까지도 몸에 밴 듯, 지금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경찰직에서 물러난 뒤,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유년 시절 꿈이기도 했던 교단에서 아이들을 만나는 일이었다. 그는 학교에서 생활 지도사로 근무하며 경찰 재직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생활 법률 상식을 교육하고 있다.

"대광고등학교와 최근 죽전고등학교까지 아이들에게 법과 사회 과목의 설명을 돕고 있습니다. 실질적인 생활 법률 상식을 전해 현장감 있는 교과 수업이 이뤄지고 있는 셈이죠. 또 체육 교사의 결원이 생길 때면 제가 직접 교사로 나서 체육 수업을 진행하기도 합니다."

팔방미인이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은 박 장인의 장기 중 하나가 바로 이 운동이다. 실제 현역 시절부터 유도 실력자로 소문났던 그는 현재 서울시 유도협회에서 승단 심사위원으로도 맹활약하며 현역 때보다 더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다. 뿐만 아니다. 색소폰 연주는 프로급 연주자들도 울고 갈 만큼 실력이 뛰어나 경찰들 사이에서는 제법 이름이 알려진 색소포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현역 시절에 처음 접했던 색소폰이 지금은 저를 가장 잘 표현하는 수단이 됐죠. 여러 곳에서 저를 찾아주시는 통에 요새는 프로 연주자 못지않은 공연 스케줄 일정을 소화하고 있습니다."

동네 소문난 파수꾼답게 하루 48시간이 주어져도 그에겐 부족한 시간처럼 보였다. 덕분에 박 장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들은 그를 향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내 자랑을 하자는 것은 아니고 이웃들이 곤란한 상황에 처하거나 민원이 발생하면 두 발 벗고 나섭니다. 경찰 일을 해 온 탓인지 가만있지는 못 하겠더라고요. 또 청소년들의 비행 현장을 목격하면 그냥 지나치는 법은 없습니다. 불러다 놓고 딱 한마디만 합니다. '지금 피우는 담배를 끊으면 명문대학교 입학한 것보다 성공한 인생이다' 덕분인지 학교에서는 저를 유독 반가워들 하십니다."

이토록 이웃 사랑이 남다른 그에겐 목에 칼이 들어와도 지키는 철칙 하나가 있다.
"다른 거 없습니다. 오직 양심, 나 자신에게 떳떳할 수 있도록 양심껏 살자는 것입니다. 욕심을 버리고 베푸는 기쁨보다 행복한 삶은 없습니다. 저의 인생 좌우명은 '호박처럼 살자'입니다. 호박은 둥글면서 굴곡이 나 있죠. 인생에 비유하자면 굴곡이 없는 삶은 지루한 삶일 겁니다. 지금까지 그래 왔고, 앞으로도 굴곡을 가지 돼 둥글둥글하게 나보다 남을 위한 삶을 살아가고 싶습니다."

/글·사진 박혜림 기자 hama@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