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센소리로 머물다가
된소리로 떠나는 일
칼이 꽃이 되는 일
피가 뼈가 되는 일
어떤 날에는
내 손이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내 손은 내가 아니니까
내 마음이 아니니까
자유는 늘 부자연스러웠다
몸의 부기를 빼는 일
마음을 더는 일
다시
예사소리로 되돌아가는 일
꿈에서 나와 길 위에 섰다
아직, 꿈길 같았다


민태원은 <청춘예찬>에서 청춘의 끓는 '피'는 '인생에 따뜻한 봄바람을 불어 보내는 것'이고 '지혜'는 '날카로운 갑 속에 든 칼'이라 했다. 청춘은 힘차고 활력이 강하며 인생 전체로는 이상과 희망과 기쁨이 넘치는 가장 아름다운 때라는 것이다. 낭만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낭만성의 바탕에는 전제되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자유'와 '자존'이다. 자유와 자존은 '나'를 잃지 않겠다는 고귀한 결의에서 나온다.
그러나 오은 시인이 노래하는 '청춘'은 이런 피상적인 낭만과는 거리가 있다. 그는 청춘을 '거센 소리로 머물다가 된소리로 떠나는 일'. 청춘의 끓는 피는 어느덧 앙상한 '뼈'가 되고, 날카로운 칼은 부드러운 '꽃'이 되는 일이라 노래한다. 그리고 다시 '예사소리로 되돌아가는 일'이라 한다. 한편으론 허무하게 느껴진다. 그것은 '내 손이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손은 자유롭더라도 자유가 아니다. 속박보다 더 무서운 것이다. 그러니까 '손'이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을 때, '손'의 자유는 자유가 아니고, 부자연스러운 구속일 뿐이다. 그러나 여기서 읽을 수 있는 것은, 손은 '내'가 되어야 하고, '내 마음'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진정한 자유가 필요하다는 역설이다.

자유(自由) 혹은 자유(自遊)는 나 자신을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도구화되지 않은 존재로 지킬 때 가능하다. 그러나 현대사회로 접어들면서 인간들은 더욱 복잡해지고 교묘해진 사회 속에서 이전보다 더욱 서로를 도구로 전락시키는 삶을 산다, 심지어는 자기 자신이 자신을 도구화시키면서 살고 있다. 내 삶의 주인으로 살고 있다고 믿으면서도 늘 무엇인가로부터 농락당하는 것 같은 느낌을 가질 때가 적지 않다. 모든 것이 경제적 가치로 결정되는 현대사회에서 무엇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은 그래서 더욱 우리를 구속한다. 자유(自由)로운 삶을 살고 싶은가. 시인은 말한다. 내 삶의 주인으로 스스로 노닐 수 있는 자유(自遊)는 '몸의 부기를 빼는 일'이며 '마음을 더는 일'이라고.

/강동우 문학평론가·가톨릭관동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