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묵 인천콘서트챔버 대표


춤과 음악의 종합예술인 발레는 한 남자의 열정으로 프랑스의 귀족문화가 됐다. 한 나라의 왕이었던 그는 발레를 권력으로 이용했다. 왕의 일생은 치열한 권력다툼 안에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누구보다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바로 프랑스의 절대 왕정 시대를 열었던 루이14세(1638~1715)이다. 그를 만나기 위해 400여년을 거슬러 프랑스로 향한다.

1643년 프랑스 국왕 루이 13세의 서거 이후 왕위를 계승한 루이14세는 5살의 어린 나이에 불과했다. 이를 걱정한 루이 13세의 왕비이자 루이14세의 모후인 안 도트리슈는 어린 왕을 위해 섭정 체제를 시작했다.
그녀는 국정 운영을 위해 이탈리아 가톨릭 추기경 마자랭을 총리로 임명하고 대부분의 국정 운영권을 넘긴다. 그러나 프랑스 관료들은 외국인의 섭정을 탐탁지 않게 여겼고, 반정부 성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마자랭과 관료들의 마찰은 점차 커져만 갔다.

안 도트리슈와 마자랭이 고군분투로 프랑스 관료들과 맞서는 시기에 어린 루이14세는 정치, 역사, 수학, 언어 등 왕이 되기 위한 교육에 열중했다. 시간이 흘러 국정을 돌볼 나이가 된 그는 왕권 회복을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인다. 고등법원의 권한을 축소하고, 왕족과 귀족의 정치참여를 제한했다.
지방에 지사를 파견하는 등 중앙 집권을 강화했다. 또 행정 개혁과 함께 수많은 전쟁을 일으키고 승리함으로써 국민의 지지를 더욱 얻기도 했다.

루이14세는 어수선한 프랑스의 왕권을 바로 잡았다. 그리고 그 비결의 한가운데 춤과 음악이 있었다. 사실 그는 어렸을 적부터 예술 다방면에 관심을 두었고, 이를 절대 왕정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했다. 왕위 계승 10년째 되는 해, 연설이 아닌 발레 작품으로 관료들에게 암묵적인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탈리아 출신의 프랑스 작곡가 장 밥티스트 륄리의 작품 '밤의 발레'는 그리스 신화를 소재로 창작된 장장 열두 시간이 넘는 작품이다. 장시간의 작품 진행 시간과 더불어 왕의 절대적인 권력을 줄거리로 한다.
루이14세는 작품의 마지막 장면 중 태양신 아폴론으로 출연해 관객인 관료들 앞에 나타났다. 거역할 수 없는 신과 같은 존재, 어린 왕이지만 자신의 존재를 태양에 빗대어 공표한 것이다. 이 작품을 통해 루이14세는 태양왕이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으며 더욱 강력한 국정 운영을 추진해나갔다.
예술에 대한 루이14세의 관심은 '밤의 발레' 무대로만 끝나지 않았다. 그의 재임 기간 내 프랑스의 예술 또한 여러 방면에서 꽃을 피웠다. 정부의 엄청난 지원 안에서 특히 발레 장르가 발달했다. 국왕의 국정 운영 방식이 예술 발전 부흥으로 이어진 것이다.

정치와 관련하여 주로 비판과 풍자 작품이 만들어졌는데, 새로운 혼합 장르인 코미디 발레가 탄생하기도 했다. 궁정 시종 중 가장 많은 보수를 받은 피에르 보샹은 발레 안무가이자 루이14세의 스승이었다. 루이14세는 자신의 스승을 주축으로 역사상 최초의 왕립발레아카데미를 설립했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발레의 다섯 가지 기본 발동작과 무용보(舞踊譜)가 이곳에서 고안됐다. 자연스레 발레곡을 연주하기 위한 악단이 만들어졌고, 이는 국공립 오케스트라의 시발점이 된다. 그뿐만 아니라, 루이14세는 자신의 권력과 예술을 동시에 꽃피울 수 있는 새로운 궁전 건립도 착수했다.

1682년, 20여년의 대공사 끝에 완성된 베르사유궁전. 그곳에서 프랑스 예술은 정점을 향했다.
한 남자의 야망이 발레를 귀족 문화로 이끌고, 나아가 국가 예술 발전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어린 시절 다사다난한 왕궁의 생활에서 춤과 음악은 그에게 안식처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 위안을 자신의 권력으로 승화시킴으로써 태양왕 루이14세는 절대 왕정 시대를 열었다.
자신보다 연륜이 깊은 관료들에게 작품으로 메시지를 전한 루이14세. 권력을 위한 예술, 예술로 꽃핀 왕정. 절대 왕정 시대의 신호탄이 된 '밤의 발레'를 준비하는 어린 왕의 포부가 얼마나 진지했을지 상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