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문화읽기] 80여년 전 손지도로 살펴보는 일제강점기 인천
[인천문화읽기] 80여년 전 손지도로 살펴보는 일제강점기 인천
  • 이주영
  • 승인 2019.03.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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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침략 교두보 '진센'에 짙게 밴 왜색
▲ 현재 인천 중앙동·항동·관동·사동·신포동·신생동 일대를 묘사한 일제강점기 손지도. /사진제공=인천역사문화센터
▲ 현재 인천 중앙동·항동·관동·사동·신포동·신생동 일대를 묘사한 일제강점기 손지도. /사진제공=인천역사문화센터

 

▲ 일제강점기 본정통. 현재 신포로23길.

 

▲ 일제강점기 중정통. 현재 관동1가.

 

▲ 일제강점기 궁정통. 현재 우현로20길.

 

▲ 현재 사동 골목.

 

▲ 일제강점기 인천항 일대. 응봉산 아래로 시가지가 펼쳐져 있다.


'일본인 시각'으로 그린 지도엔

옛 인천부청 일대 모습 자세히

관공서·수탈은행·병원은 물론
일본인 거주자 이름까지 기록


일제시대, 인천은 일본인에 유독 가까웠다. 그리고 해방 후 70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당시를 기억하는 재인천 일본인들은 생생한 그 때를 떠올린다. 옛 인천부청 일대의 골목골목에 일본인들은 터를 닦았다. 그 때를 떠올리며 손으로 한땀한땀 이어간 지도 하나. 80여년 전 일제의 숨결이 다시금 폐부를 찌른다. 그래도 이 손지도를 토대로 과거를 더듬고 현재를 엮을 수 있다는 것에 의미를 삼으며, 옛 지도가 흔적한 거리와 골목, 건물을 떠올린다. '그 때 인천은 이런 모습이었겠구나'.

일제강점기가 최정점에 이를 때, 인천 인구의 태반은 일본인이었다. 당시 그들은 어찌보면 한반도의 작은 일본과 같은 곳, 그 곳을 꿈꾸지 않았을까. 지금도 중구 일대를 둘러보면 왜색을 쉽게 만난다. 중구청(옛 인천부청) 주변으로 근대 일제의 위엄을 보이는 듯한 각종 수탈은행은 물론 주변에 남은 일본 다다미집.

그리고 응봉산에 기대 축대를 둘러친 주택을 보고 있으면 옛 영화를 기억하는 것 같다. 그래서, 지역의 노학자는 1919년 3·1만세운동이 대대적으로 일어난 인천을 향해 '기적'과 같은 구국의 함성이라 일컫는다.

▲촘촘한 일제의 손길
인천역사문화센터가 손지도 하나를 내놨다. 옛 인천부청(현 중구청)을 기준으로 일대를 여러장으로 엮었다. 손으로 일일이 골목 곳곳을 그려 넣고 상점과 은행, 병원은 물론 당시 친구가 살았을 법한 집들까지 지명과 호명, 거주자를 지도에 빼곡히 적어냈다.

김락기 센터장은 "2018년 봄 해방 당시 신흥초등학교와 축현초 1학년이었던 일본인 세명을 만났다"며 "그들을 모시고 온 이노우에씨를 통해 지도가 제작됐다"고 설명했다.

이노우에 코이치(井上浩一)씨는 만석동의 옛 조선기계제작소(朝鮮機械製作所)에서 근무했던 할아버지를 둔 인연으로 인천에 대한 관심을 갖고 '인천을 생각하는 모임(https://jinsendayori.jimdo.com/)' 웹사이트를 운영 중이다. 그들은 당시 인천에 거주한 일본인의 시각에서 인천을 그려냈다.

지도에는 학교와 관청, 소방서 등 관공서와 공공시설은 물론 목욕탕, 식당, 병원, 여관, 사찰, 세탁소, 택시부, 담배가게 등의 상호명이 일목요연하게 적혀있다. 또 인천부청 밑으로 집집마다 당시 거주했던 일본인의 이름까지 더했다. 빈 공간은 가물가물한 기억에 빈칸으로 남았다.

센터에 따르면 1952년 일본으로 돌아간 인천 거주 일본인들은 인천에서 철수한 상황을 담은 <인천인양지(仁川引揚誌)>를 고타니 마스지로(小谷益次郞)가 폈다. 인천에 대한 강렬한 기억은 일본 지역마다 인천향우회 성격의 '인천회'가, 그 연합체로서 '대인천회'가 구성됐다.

김 센터장은 "인천의 일본 발음인 '진센'을 홈페이지 주소로 쓰고 있듯 이 지도 작성은 철저히 일본사람들의 시선에 따른 것"이라며 "이 지도는 1940년 전후의 개항장 일대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이해하는 데 매우 유용한 자료"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잘 정돈된 거리와 상점은 어디까지나 일본인을 위한 것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김 센터장의 언급처럼, 당시 인천의 일본인은 '리틀 재팬'을 꿈꾼 듯 빼곡히 인천에 뿌리를 내렸다. 이 손지도에 한국민의 흔적을 찾기는 어렵다. 일제강점기의 아픔을 잊지 말아야겠지만 1940년대 인천의 사회상을 더듬는데, 이 손지도의 효용성이 큰 것은 사실이다.

▲손지도, 흔적을 더듬다
옛 인천부청(현 중구청) 좌우로 기능을 알 수 없는 '대화조'와 '우체국'이 놓였던 것 같다. 그리고 인천부청 좌측 상단에는 일본인학교라고 적혀 있다. 그리고 옆으로 빼곡히 일본인 거주자의 명칭과 서양요리점도 보인다.

골목 밑으로는 요리집과 담배파는 곳은 물론 목욕탕 기호가 있다.

현재는 '근대박물관'으로 바뀐 조선은행(옛 제일은행), 18은행을 살펴볼 수 있고 옆으로 안전은행(58은행)이 서 있다. 그들 건물 한 블록 옆으로는 세창양행이 자리잡았다. 중구청은 수년 전 구청 앞 거리를 일본풍으로 개조했다. 세금을 들여 외관을 근대 일본식 상점으로 바꾼 것에 세인들의 비판 목소리가 컸지만 구청은 '관광객 유치'를 이유로 들었다. 지금 중구청 앞에는 근대 인력거꾼 동상과 손을 흔들고 서 있는 왜색 고양이를 접할 수 있다.

지금은 인천아트플랫폼과 한국근대문학관, 칠통마당 등이 사용 중인 창고건물이 해방 전에는 대단한 규모인 듯 싶다. 특히 일제강점기 거창한 사건의 한복판에 서 있던 미두취인소와 조선상업은행, 조선식산은행의 위치가 확 눈에 띈다.

신포동 일대 지도는 상점과 관공서, 집들로 빼곡하다. 현재 편의점이 들어선 옛 약국과 맛집으로 소문난 수 십 년 된 짜장면집의 옛 이름은 '일'자로 시작했다. 경성전기 인천지부와 일선해운은 무슨 일을 했을까. 조선인 출입이 힘들었을 축항병원과 서입병원, 삼구병원은 물론 일본탕으로 적힌 목욕탕도 있다. 일한서점, 조일신문 본점, 지금도 성업 중일 가구점도 있다.

/이주영 기자 leejy96@incheonilbo.com
/사진제공=유동현 전 굿모닝인천 편집장·인천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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