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승철 문화체육부장

최근 인천에서 서울을 잇는 철도 부설 논의가 기존 기록인 1888년보다 4년가량 앞선 1884년 인천에서 견적서를 보고하는 등 구체적으로 진행된 사료(史料)가 발굴됐다.
이 사료를 공개한 인천본부세관 화물검사과 김성수 과장에 따르면 1883년 1월1일 인천항 개항 이후 1년여 만인 1884년경 초대 총세무서장(현 관세청장) 파울 게오르크 폰 묄렌도르프는 당시 인천해관 세무사(인천세관장) 스트리플링(A.B Stripling)과 해관의 기기사(器機師, 엔지니어) 베코프스키에게 제물포와 서울을 잇는 트램(Tramway)을 구상케 한 후 견적서를 작성해 보고토록 지시했다.
이에 따라 1884년 11월22일(음력 10월5일) 인천해관에서는 필요 예산 추정안이 담긴 제물포~서울 노면전차 부설안과 공사에 소요되는 비용을 나름대로 추산해서 견적서를 작성, 묄렌도르프에게 보고했다.
특히 이 문건에는 베코프스키가 견적서의 '수정본'이라고 밝혀 이보다 앞서 묄렌도르프에게 전달한 자료가 존재함을 의미한다.

김 과장이 번역한 보고서에는 "총세무사님, 여기 서울과 제물포간 목제 노면전차의 정정 비용 견적서를 제출합니다. 아시겠지만 견적서는 목재, 침목의 부설 및 레일에 대한 것과 객차 1량, 화차 1량에 대한 것이며 (레일조성을 위한)토지수평작업이나 레일을 준비하는데 드는 비용은 제외하였습니다.

본 건과 견적에 대해서는 (해관의 엔지니어인)베코프스키와 상의하였는데 그가 제안한 방안에 대해 지금 총세무사님께 보고드리며 그는 공사를 마치기까지 필요한 못에 대해 첫 번째 견적서에서의 95 피쿨(Picul, 5.7ton)로는 부족하고 적어도 110 피쿨(6.6ton)이 필요하다고 추정하였습니다"라고 적혀 있다.
베코프스키의 보고서에서 주목할 부분은 '정정 비용'이라는 점이다. 이는 이미 최소한 한차례 이상 견적서가 보고됐고 견적서를 작성하기까지 조사기간을 따지면 수개월 전부터 경인철도를 부설하기 위한 조사가 착수했을 거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또한 일반 증기기관차가 아닌 트램(Tramway) 방식으로 구상한 점도 특이하다. 당시 전력 상황을 고려할 때 운행에 필요한 동력이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이 없어 연구가 좀 더 필요한 부분이다.

특히 인천항 개항 직후에 독일인 묄렌도르프의 주도하에 영국인 스트리플링, 러시아인 베코프스키 등이 경인철도의 부설을 검토했다는 사실은 경인철도가 조선과 미국에 의해 처음 논의된 뒤, 미국인이 착공하고 일본에 의해 개통됐다는 점에서 당시 조선 또는 개항장 인천을 둘러싼 미국, 독일, 영국, 러시아, 일본 등 주변 열강들이 벌인 역학관계의 단면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그동안 우리나라 철도의 시점은 조선으로부터 철도 부설권을 허가받은 미국인 사업가 J.R. 모스가 1897년 3월22일 인천 우각리(현 경인전철 도원역 부근)에서 경인선 기공식을 가진 뒤 모스로부터 철도 부설권을 넘겨받은 일본에 의해 1899년 9월18일 제물포~노량진 구간이 개통한 날짜를 시점으로 삼고 있었다.
하지만 문화재청은 지난 2월 경인철도 개통 11년전인 1888년 독립운동가 월남 이상재(1850~1927) 선생이 주미국 조선공사관 관원으로 일할 때 철도 부설을 위해 미국과 협상을 벌인 외교문헌을 통해 확인됐으며, 이 문서는 이상재 선생의 후손이 기증한 유품에서 발견됐다고 밝혔다.
경인철도는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로 경인공업지대를 관통하면서 화물과 여객을 수송하고 있으며 수도권 운송 체계의 중요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역사는 기록된 자료가 쌓여 완성되어가는 것이라면 이번에 발견된 '베코프스키 보고서'는 비록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충분한 역사적 가치와 의미를 갖고 있다.
경인철도 부설논의의 시원(始原)을 4년 앞당길 사료가 발견된 만큼 인천시는 역사학계 등과 함께 철저한 고증과 연구를 거쳐 인천의 역사적 사실을 밝혀주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