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백년 손맛 밴 '내옷' … 걸쳐보면 바로 입고 가실걸요
▲ 송인욱 장인이 본인이 만든 양복을 들어보이며 정교한 바느질 솜씨를 소개하고 있다.

 

▲ 송인욱 장인이 자신의 가봉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18살때 재단·가봉기술 배워
은사 김상태 양복점 물려받아
성남에서만 44년째 만드는 중

비접착기법·최고급 원단으로
10년 지나도 그대로 착용 가능



한 올을 다투는 손 맛, 한 땀 한 땀 정성스레 지어낸 수제 양복 한 벌은 빛이 바랬을지언정 멋스러움 묻어난다. 명품은 달리 명품이 아니다. 오래도록 시간이 지나도 변함없는 모습을 유지한 옷, 항상 손이 가는 내 몸에 딱 맞춰진 이 세상 단 하나뿐인 옷이야 말로 진정한 명품이다.
50여년간 수제 양복 외길 인생을 걸어온 '바느질의 장인'을 성남에서 찾았다. 열한 번째 발견 송인욱 장인을 소개한다.

#옷은 올을 다툰다

고작 20~30년의 경력 가지고는 어디 가서 명함도 못 내민다. 적어도 양복을 만드는 '양복장이'들 사이에서 만큼은 그렇다. 유년시절 못다 한 배움 대신 기술을 익힐 요량으로 잡기 시작한 바느질이 벌써 50년째다. 성남에서만 44년째 양복을 만들어 오고 있는 '김상태 양복점'의 송인욱 장인을 두고 하는 얘기다.

"부친이 돌아가시면서 가세가 기울었고 더 이상 학업을 이어가는 것은 사치가 됐죠. 당시만 해도 기술을 배우는 것이 최고로 여겨지던 시대였고, 그중 양복 기술을 배우겠다며 18살 때 한창 양복점들이 성행하던 서울로 상경하게 됐습니다."

송 장인은 명동과 종로 일대의 양복점에서 재단과 가봉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손재주가 뛰어났던 그는 비교적 단시일 내에 기술을 습득했다.

"대개 바지는 2년 정도 배워야 하고 저고리는 3년 정도 도합 5년이 꼬박 걸립니다. 그마저도 제대로 하기 어려운 일이 양복을 만드는 일입니다. 그만큼 정교한 작업을 요하기 때문에 도중 그만두는 사람도 많습니다. 저는 그래도 좋은 스승님을 만난 덕분에 정확하고 빨리 배우게 됐습니다."

유독 빠르고 정확한 손바느질 실력에 송 장인을 향한 러브콜은 숱하게 이어졌다. 한사코 모두 거절한 그는 1976년, 성남으로 옮겨와 처음으로 본인의 이름을 내건 양복점을 열었다. 송 장인의 양복점은 입소문을 타고 전국 각지에서 몰려들었다. 1년에 500여벌을 지을 정도로 주문이 쇄도했다.

그러던 중 은사이자 같은 지역에서 양복점을 운영하고 있던 김상태 선생으로부터 제안을 받았다. 연로해진 탓에 양복을 만드는 것이 힘에 부치면서 송 장인이 당신의 양복점을 맡아주길 바랬다. 그의 제안을 뿌리치지 못한 송 장인은 운영하던 양복점을 접고 김상태 양복점의 주인이 됐다.

"선생님의 뜻에 따라 상호명은 바꾸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게 됐습니다. 선생님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도록 사명감을 가지고 운영하고 있습니다. 벌써 성남에서만 44년째가 되어가는군요."

#반백년 양복장이

70년대 당시에는 성남 일대에만 300여곳이 넘는 수제 양복점이 있었다. 그러나 90년대 초반, 의복 산업의 발달로 값싼 기성 양복에 밀려 수제 양복은 사양길을 걷기 시작했다. 점차 문 닫는 양복점들이 늘어났고 지금은 손에 꼽힐 정도로 점포수가 줄어들었다.

"물론 기성복이 발달하면서 손님이 줄어든 것도 원인이지만 신소재 원단이 개발되면서 작업을 하기는 더욱 까다로워졌죠. 실력이 어설펐던 이들은 다루기 어려워진 소재에 수제 양복만이 가진 이점을 소화하지 못하자 손을 떼기 시작했습니다. 저 역시 실력이 없었으면 지금까지 올 수 없었을 겁니다."

송 장인이 이토록 자부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송 장인의 옷만을 고집하는 40년 단골손님들이 그것을 대변한다. 젊은 날 청년의 모습이었던 손님은 중년이 다 돼도록 김상태 양복점, 송인욱 장인의 옷을 입었다.

"40년을 함께해준 고마운 손님이면서 가장 까다로운 손님이기도 했죠. 한 날은 옷 속에 안감을 뒤집어 보고 실밥이 튀어나와 있다며 얘기를 전하더군요. 그때 깨달았죠. 아무리 겉이 멀쩡하게 보이더라도 허투루 만든 옷은 모두 표가 난다는 것을"

송 장인의 옷을 찾는 손님들은 오래된 손님이든 오래되지 않은 손님이든 그에게 언제나 스승과 같았다. 손님의 각기 다른 취향과 체형을 고려해 만들어내야 하는 수제 양복에서 손님 한명 한명에 대한 학습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올해 일흔을 바라보는 송 장인이지만 손님들의 이름 석자부터 체형 정보들까지 줄줄 꿰고 있는 모습에서 반백년 양복 장인다운 면모가 느껴졌다.

"손님들에게 최종 완성된 양복 상의를 항상 입어보시라 말씀드립니다. 그것을 토대로 저도 공부를 하는 것이죠. 이런 부분은 다음에 수정해야겠다. 이런 부분은 잘됐구나 하면서요. 또 사람마다 체형이 다르죠. 가슴이 튀어나온 사람, 어깨가 굽은 사람 이런 사람들의 특색에 맞춰 지은 옷이 수제 양복의 매력이기도 하고요. 그렇기 때문에 우수한 품질을 기본으로 손님 한 명 한 명을 기억하는 것도 당연한 저의 역할입니다."

양복장이들 사이에서 그의 명성은 자자하다. 마치 기계로 짠 듯한 정교하고 꼼꼼한 손 바느질 솜씨에 정·재계 유명 인사들은 두 발로 그를 찾아왔다.

"한 기업의 대표가 찾아온 적이 있었죠. 맞춤옷이 제법 마음에 들으셨는지 옷을 찾으러 오는 날 옷 3, 4벌을 더 맞추고 가시더라고요. 그때 인연으로 지금까지도 매년마다 옷을 주문해주시고 계십니다. 가끔 지방에서 이곳까지 올라와 옷을 맞추는 분들도 계시고 다른 곳에서 지은 옷을 환불하고 이곳에서 다시 양복을 지으시는 손님들도 계셨습니다. 그럴 때마다 보람됨을 느꼈습니다."

고기도 먹어본 이가 고기 맛을 알았을 터. 수제 맞춤 양복은 한번 경험했던 사람이 찾는 경우가 많다. 고가임에도 기성복과는 다른 수제 양복만의 특별한 매력은 소비자들로부터 이름난 수제 양복 장인들을 찾아 나서게 만들었다. 특히 송 장인의 양복이 그랬다. 김상태 양복점의 옷은 비스포크(비접착식 맞춤 슈트) 기법으로 지어져 착용감이 뛰어나고 최고급 원단을 사용해 품질이 우수하다. 또 10년이 지나도 쉽게 변질되지 않는 형태는 송 장인의 옷을 고집하게 만든 결정적인 요인이다.

"기성복을 입고 오셨던 손님이 맞춤옷을 처음 입어보시더니 입고 왔던 재킷을 버려 달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만큼 확실한 차이를 느끼셨던 모양입니다."

이같이 반백년 양복장이로 살아온 송인욱 장인에게 변하지 않는 철칙이 하나 있다.
"친절과 정성이죠. 나를 앞세우기보다 손님의 입장에서 친절한 자세로 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멀리서 찾아주시고 오랫동안 찾아주시는 손님들에게 답례하는 방법은 정성스럽게 옷을 지어드리는 것, 기분 좋게 옷을 입고 돌아가시는 것이 곧 저의 사명입니다."

/글·사진 박혜림 기자 hama@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