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전의 송건호선생
생전의 송건호선생
  • 승인 2001.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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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해를 마감하는 세밑이면 하찮은 기억조차 허술히 넘기지 못하는 것이 지닌바 인정이다. 하물며 세월 따라 생각을 더불어 나누었던 송건호(宋建鎬)선생이 떠난 마당에 있어서야.
 고인이 반 독재·민주화에 이바지한 참 언론인이었음은 구구한 설명을 구할 것도 없이 한국기자협회가 가장 존경받는 언론인으로 지목한 사실 하나만으로도 공감하는 바이다.
 돌이켜 보건대 고인과의 첫 회동은 군사분계선 최전방 동태를 취재코자 경비행기에 동승했던 지난 67년 일화에서 비롯하며 이후 `동갑내기""는 30여년을 이어 허물없이 지내온 터이다.
 당시 여의도에는 이 나라 첫 비행사 안창남 모국비행(1922년)으로 알려진 간이비행장이 그대로 남아있었으니 생각할수록 상전벽해(桑田碧海)를 방불케하는 격세지감을 부인할 수 없다.
 일명 `잠자리 비행기"" 단발 정찰기에 오른 하늘 길은 화천 북방에 이르러 지프로 바뀌어 고인은 동부전선으로 나는 중부전선 백운산 일대를 굽이돌며 일촉즉발의 현장을 메모했다.
 며칠 뒤 소임을 다하고 다시 전방비행장에 돌아와 보니 고인은 묵직한 바둑판을 안고 웃고 있었다. 사연인즉 전방초소 사병들이 여가 틈틈이 공들여만든 정성어린 기념품이라서 매정히 사양할 수 없었다는 변명 아닌 해명이었다.
 요즘 세태에 비유하자면 무게가 족히 1억원 현찰 사과상자 아닌 `나무토막""을 대견스럽게 여긴 꼴이니 고지식하고 천진한 성품이 가감 없이 드러나는 삽화 한 토막이 아닐 수 없다.
 두번째는 70년 한 여름에 있었던 이야기. 언필칭 `중앙일간지""에서 차출되어 1개월에 걸쳐 10여개국을 두루 순방하는 길에 고인과 또다시 침식을 같이 할 기회를 얻었다.
 거두절미하고 회견에 임하면 해박한 식견과 예리한 분석을 통해 현안을 짚어나가기에 군색함이 없었으며 특히 개발도상국이 지닌 민주화 진척도를 보는 시각이 남달랐다.
 고인의 인상은 한마디로 외유내강 그 자체다. 콸라룸푸르에서 열린 메르데카배 축구경기에서 한국선수 응원에 임하던 열띤 모습은 뒷날 또 달리 내재한 불같은 면모를 미루어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예정된 공식 일정이 아직 남아 있는 상황에서 고인만이 굳이 폐쇄국가인 미얀마로 떠났던 일(네윈이 표방하는 미얀마식 사회주의 정책) 또한 전후 일관했던 관심으로 이해된다.
 한편 긴 여정을 마치고 귀국한지 얼마안가 이번에는 느닷없이 박정희 전대통령의 부름을 받아 일행중 몇몇이 청와대를 예방했던 바 이 때도 고인과 함께 행동했음은 물론이다.
 명분은 국제정세 현황을 보고하는 것으로 되어있었으나 실은 격식을 떠나 세상 돌아가는 사사건건을 격의 없이 나누고 싶었던 배경이 소탈한 박 전대통령의 본심으로 헤아려진다.
 밤 9시가 넘도록 의중에 있는 말을 무례를 무릅쓰고 다 털어놓는 와중에서 술잔과 담배가 이어 오갔으니 술 담배를 못했던 고인으로서는 여간 고역이 아닐 수 없었으리라.
 무릇 글은 쓴 사람의 마음이요 인격이다. 박 전대통령은 비록 현실 상황으로 말미암아 정견을 달리했을 망정 고인의 논조에 주목해 왔고 가능한 자문을 구하고자 했으나 끝내 정치권을 넘보지 않았던 고인의 신념이다. 이는 무사도(武士道)와 기사도(騎士道)를 신봉하는 두 사람의 결합될 뻔 한 역사의 아이러니로 기억될 것이다.
 각설하고 많은 세월이 흐르고 `인천 5·3사태""여진이 미처 가라앉지 않은 94년(?) 어느 날이었다. 주안성당에서 열린 한 모임에 참례했더니 갑자기 “김형 오랫만이야”하며 몸을 끌어안는 이가 있어 돌아보니 백발이 성성한 고인이었다.
 당시 서로가 큰 병 직전이었음은 신(神)만이 아는 예정인지라 무상할 따름이며 지금도 어디선가 “어! 김형”하고 부를 것만 같기에 송 선생의 명복을 이어 비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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