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사기로 헤매던 김구, 조국 독립 활로 찾다
▲ 청년 김창수가 인천감리서 감옥을 탈옥해 지나쳤을 용동 샛길.

 

▲ 청년 김창수의 탈주로.

 

▲ 응봉산(현 자유공원)에서 바라본 인천감리서.

 

▲ 인천시 중구 내동 인천감리서 터 표지.

 

▲ 대중일보 1946년 4월15일자 1면에 실린 백범 김구의 인천 방문 기사.


'차하포사건'으로 인천감리서 투옥
옥실 마루 밑 땅 파 빠져나와 탈옥

현 자유공원·북성포구 밤새 걷다
용동 우물터·해광사 넘어 서울로


백범 김구(1876년 8월29일(음력 7월11일)~1949년 6월26일)는 인천을 '역사의 심장지대'라 일컬었다.

3·1만세운동 100주년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올해, 누구보다 가슴 졸이며 해방을 꿈꿨고 조국 독립의 염원에 온 힘을 불사른 김구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인천은 김구가 생애 두 차례 옥고를 치른 곳이다. 인천 곳곳에서 김구의 흔적을 만날 수 있고, 인천대공원에 우뚝 선 김구 선생과 그의 모친 곽낙원 여사를 볼 때면 가슴이 뭉클해진다.

3월19일은 김구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지 않고 온 힘을 다해 조국의 등불이 되겠다는 일념으로 탈옥에 성공한 날이다. 사라진 옛 것은 많지만, 그의 정신은 아직도 영롱하다. 김구가 이날 탈옥에 실패했다면 우리의 역사는 어떻게 됐을까. 김구가 탈옥으로 헤맸던 곳을 살피며 그의 민족 의식을 다시 느껴본다.


수 일째 날씨는 쾌청했다. 묘시(오전 5~7시) 전에 이미 사위는 어스름해지고, 술시(오후 7~9시)에서 한참이 지나야 칠흑같은 밤이 찾아온다.

23살 청년 김창수는 어둠이 짙게 깔린 후에야 탈옥을 감행했다. 이미 며칠 전부터 마루 밑바닥을 파냈다. 대지가 녹고, 봄이 찾아온 지금이 적기다. 더 늦으면 탈옥을 감행할 시간이 부족하고, 탈옥 후에도 인천을 빠져나가기 수월치 않기 때문이다. 옥실 마루 밑 땅을 기어나와 감옥 담을 넘었다. 한 고비를 넘겼고,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감리서 정문인 삼문을 빠져나왔다. 탈옥 후, 개화를 목도한 청년 김창수는 연하(蓮下) 김구로 다시 태어났다.

승정원 일기를 훑어봤다. 1898년 3월19일, 양력으로 변환된 이 날을 음력으로 환산하면 그해 2월27일. 승정원 일기는 그 날을 맑다(晴)고 기록했다. 앞날과 뒷날 역시 밤안개와 햇빛은 탈옥수 김창수를 도왔다. 당시의 인천 날씨를 확인할 수 없기에, 서울 날씨에 견줬지만 탈옥수 김창수가 서울 양화진까지 올라간 과정에서 백범일지를 통해 날씨에 대한 언급이 없는 만큼 탈옥을 위한 날씨는 수월했던 것 같다.

그리고 121년 전 이날은 박명 일출시간이 오전 5~6시, 일몰은 오후 7~8시 사이인 만큼 술시를 넘기고서야 김창수가 탈옥을 감행했을 것으로 예상된다.

▲김창수, 사형수에서 탈옥을 꿈꾸다
올해는 백범 김구 선생의 서거 70주기이다. 백범 선생의 첫 지방방문지는 '인천'. 1946년4월15일 대중일보 1, 2면은 온통 백범으로 채워졌다. 그날 제목은 '인천 축항의 노역 죄수 김구(金龜), 지금은 건국도상의 거인 김구(金九) 주석, 작일 내리 기독교당에 청년 김구 재현'이다.

김구는 이날 내리교회에서 약 45분간 인천의 감옥생활을 술회했다.

김구는 "인천감옥에 투옥되었었는데 그때 나의 자친이 가져다주시는 '밥'의 모양이 여러 가지임을 보고 여러 집에서 빌어오신 것임을 추측할 수 있었다"며 "사형시간이 지나도 집행치 않으므로 도리어 궁금히 생각하고 있던 바 동석(同夕) 6시경 사형만은 취소하였다는 통지를 조선인 관리에게 들었다"고 설명했다.

김구는 "나는 탈옥을 계획하여 익년 2월경 간신히 목적을 달성하여 천신만고로 겨우 서울 잠입에 성공하였다"고 설명했다.

백범김구기념사업협회에서 발행한 '백범의 길 조국의 산하를 걷다'에 따르면 김구는 그의 나이 21세인 1896년 3월9일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에서 일본인 쓰치다를 살해했고, 음력 7월7일(양력 8월15일) 인천감리서로 왔다. 김구가 포박당한 채 당도했던 인천항은 지금의 인천여상 자리 왼쪽 어름으로 보인다. 현 파라다이스호텔 인천항 부교는 주로 일본인이 사용했고, 이 곳은 조선인 이용 부두이다.

백범일지에는 인천감리서 감옥 모습이 소상히 기록돼 있다.

백범일지에는 "내리 마루턱에 감리서가 있고, 왼편에는 경무청이 있으며 오른편에는 순검청이 있었다"고 했다. 인천감리서 감옥은 1884년 8월쯤 내동에 감리서가 세워질 때 함께 만들어졌다. 감리서 앞으로는 제물포 포구에서 한양으로 올라가는 육로인 경인가로가 가로놓여 지나고 있었다.

▲탈옥길을 걷다
김구는 2년간 옥살이를 하며 인천항재판소에서 1896년 8월31일, 9월5일, 9월10일 세 차례 신문을 받았다. 그러나 김구는 고종이 양형을 재가하지 않아 최종형이 확정되지 않은 '미결수'로 감옥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우리나라 최고 국제항인 인천항. 김구는 "인천항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먼저 개항된 곳이었으므로, 구미 각국에서 들어온 거주자와 여행자들이 있었고 각 종교당도 설립되었다. 우리나라 사람 중에서도 간혹 외국으로 장사하러 나가 다니면서 신문화의 취미를 아는 자가 약간 있던 때였다"고 밝혔다. 당시 인천항에는 인천전관조계, 청국전관조계, 각국 공동조계를 비롯해 신문·은행·극장 등이 세워졌다.

김구는 참형을 모면했지만 양친의 탄원서가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김주경의 탈옥을 권하는 시(詩) 등에 따라 "구차스럽게 사는 것을 위해 생명보다 중한 광명을 버릴 수 없으니 우려치 말라"는 각오를 보였다.

또 "나를 죽이려 애쓰는 놈은 왜구들뿐인데, 내가 그놈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옥에서 죽는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지 않겠는가"라고 되뇌었다.

드디어 1898년 3월19일, 김구는 조덕근과 양봉구, 김백석과 함께 옥실 마루 밑 땅을 파고 빠져나가 감옥 담을 넘어 탈옥에 성공했다.

백범의 탈출기는 이렇다.

"탄탄대로로 나왔다. 봄날인데 밤안개가 자욱한 데다가 연전에 서울 구경하고 인천을 지나가 본 적은 있으나 길이 생소하였다. 어디가 어디인지 지척을 분간 못할 캄캄한 밤에 밤새도록 해변 모래밭을 헤매다 동쪽 하늘이 훤할 때에야 비로소 살펴보니 감리서 뒤쪽 용동 마루터기에 당도해 있었다. 수십 걸음 밖에서 순검 한 사람이 벌써 군도를 절그럭절그럭거리며 달려왔다. 또 죽었구나 하고 은신할 곳을 찾았다. 서울이나 인천의 길거리 상점에는 방문 밖에 아궁이를 내고 방문 앞에는 아궁이를 가릴 긴 판자 한 개를 놓고 거기에다 신을 벗고 점방 출입을 하게 되어 있다. 선뜻 그 판자 밑에 들아가 누웠다. 순검의 흔들리는 환도집이 내 코끝을 스치는 것 같이 지나갔다. 나는 얼른 몸을 일으켰다. 하늘이 밝아 오고 천주교당의 뾰죽집이 보였다. 그것이 동쪽이라고 짐작하고 걸어갔다."(백범일지 133쪽)

인천감리서를 빠져나온 김구는 일행과 바로 흩어졌다. 요즘처럼 변덕스런 날씨와 같았던 그날, 밤안개 자욱한 인천 시가지를 밤새도록 걸었고 해변 모래밭까지 가서 헤매었다. 그리고 성공회 내동교회 옆 샛길을 거쳐 중국인 묘지가 있던 현 인현동 언덕길을 내려가 바닷가에 당도했을 터.

지금은 모두 매립돼 육지로 변했다. 김구의 당시 탈출길은 상상만으로 그릴 수 있다. 다만 자유공원이 있는 응봉산 뒷길을 밤새도록 걸었고, 현 북성포구 인근의 바닷가나 인천 국철 1호선 동인천역 일대 섭도포 바닷가를 헤쳐 다니지 않았을까. 용동 마루터기는 인천감리서에서 불과 500m 남짓. 그 거리를 밤새도록 누비고 다녔던 것이다.

날이 밝아오자 '천주교당 뾰죽집'이 보였다 한다. 용동 마루터기에서 내려다보이는 답동성당(옛 제물포본당)을 일컫는다. 화개동을 걷다가 한 일꾼의 안내로 후미진 소로를 따라 화개동 마루터기를 걸었다. 현 해광사 절 부근으로 추정되고, 이 곳에서 한나절 피해있다가 해질녘 시흥 방면으로 향해 걷다가 어느 동네 디딜방앗간에서 하룻밤을 자고 새벽에 일어나 벼리고개를 넘어 부평을 거쳐 그날로 양화진 나루에 도착한다.

백범일지대로라면 인천감리서 → 응봉산 뒷길 → 북성포구 근처 → 중국인 묘지 → 용동 마루터기 → 화개동 마루터기 → 시흥방면 → 벼리고개 → 부평 → 양화진 등으로 정리된다. 현재 이곳들은 신포스카이타워아파트 → 자유공원 뒷길 → 송월동 동화마을 → 인천역 주변 → 홍예문 뒤 인천 119심폐소생교육센터 주변 → 용동우물터(우현 고유섭 집터) → 해광사 등으로 읽혀진다.

지금 이곳은 두 시간 남짓이면 둘러볼 수 있다. 인천감리서는 흔적도 없고 기념표지만이 당시의 모습을 상상케 한다. 응봉산에 의지한 중구는 곳곳이 축대가 쌓여 있는 만큼 돌과 시멘트가 어울어진 곳이다. 당시의 흙길은 없지만, 골목에 의지한 현재의 집터들을 띄엄띄엄 상상하며 감리서터를 넘어 자유공원으로 향한다. 그리고 바닷쪽보다는 후미진 뒷편을 따라 걸으면 송월동 동화마을과 만나게 된다. 밑에는 인천역과 동인천역 사이 북성포구와 맞닿아 있고, 이 곳을 다시 오르면 중국인 묘지가 조성됐던 제물포고교 인근 고개길이다.

육지로 향하는 언덕을 넘어 아랫길을 걸으면 당시 모습은 상상할 수 없는 신작로와 용동 큰 우물을 만나게 되고, 김구가 전한 천주교당 뾰죽집은 상가 건물에 가려 찾을 수 없다. 다만 경동쪽으로 언덕을 조금 걸어야 답동성당 첨탑을 만날 수 있고, 여기서 기독병원 옆길을 따라가면 율목도서관과 율목공원을 만난다. 그 밑에 해광사가 있다. 여기까지는 김구 탈출의 흔적을 그릴 수 있다. 그 다음은 상상하기 힘든 만큼 인천 학계의 몫이다.

/이주영 기자 leejy96@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