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드시 읽거라, 제국주의 밀어낼 '힘'이다
▲ 다산의 외증조, 공재 윤두서 자화상-국보 240호(고산 윤선도유적지 소장) <사암선생연보(俟菴 先生年譜)>에 선생의 외모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다산의 얼굴 모양과 수염은 대부분 외증조 공재 윤두서의 모습을 닮았으며 선생도 늘 말하기를
▲ 다산의 외증조, 공재 윤두서 자화상-국보 240호(고산 윤선도유적지 소장) <사암선생연보(俟菴 先生年譜)>에 선생의 외모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다산의 얼굴 모양과 수염은 대부분 외증조 공재 윤두서의 모습을 닮았으며 선생도 늘 말하기를 "나의 정신이나 모습 대부분은 외가에서 받았다"고 말했다.

흥미로운 기록부터 본다.

"다산 정약용이야말로 이조가 배출한, 아니 박해한 위대한 학자다. 그는 천주교로 개종했다는 의심을 받았다. 그의 정적들은 그를 비참하게 만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이 학자의 진가를 알고 있었던 정조(正祖)가 그를 어여삐 보지 않았더라면, 그는 아마 처형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는 16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면서 매우 광범위한 주제를 다룬 70여권(저자주: 선생의 저서는 500여권이 넘는다)의 귀중한 원고를 남겼다. 그런데 요즘에도 노론계에 속하는 인사들은 그가 남인이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의 책을 읽지도, 사지도 않는다."

노론의 후손들이 그를 증오한다는 <윤치호일기: 1916년~1943년>이다. 여기서 요즈음은 일제치하인 1930년대이다. 다산 선생 사후, 120년이 지난 뒤다. 그것도 을사오적이 나라를 팔아먹은 식민치하였다. 이 나라를 다스렸던 사람들 후손이기에, 아니 그 당시에도 권력을 누리던 이들이었기에 모골이 송연해진다.

하지만 모두 이런 파렴치한들만 이 땅에 존재했던 것은 아니었다. 같은 시기이지만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는 "선생(茶山) 한 사람에 대한 고구(考究)는 곧 조선사의 연구요, 조선 심혼(心魂)의 명예 내지 전 조선 성쇠존망에 대한 연구"라고 평가하였다. 일제의 식민지배에 대응하기 위한 내면의 힘을 다산 정약용에게서 찾고자 했다는 뜻이다. 그러고 해방을 맞았다. 다산의 학문은 남과 북으로 나뉘어졌다.

<우리말 큰사전>(한글학회 지음, 1992) 실학: 실지에 소용되는 학문. 곧 실생활 가운데서 진리를 찾고 이를 실천에 옮기려던 학풍을 가리키는데 17~18세기의 조선조에서 융성했었다.

<조선말대사전>(사회과학원 언어연구소 편, 1992) 실학: 17세기 초부터 19세기 중엽까지에 우리나라의 일부 진보적인 봉건 양반들이 당시의 부패 타락한 봉건통치배들의 썩어빠진 학문을 비판하고 국가 및 사회경제생활에서 현실적으로 나서는 문제들을 풀려고 한 진보적인 학문. 주자성리학에 대립된다.

일찍이 다산학에 눈 뜬 최익한(崔益翰, 1897~?)은 "고심의 혈을 기울여 먹물[墨汁]을 대신한 것이 선생의 붓이었다. 온 세상 사람의 백안(白眼)을 무릅쓰고 뒷사람의 지기(知己)를 대상으로 한 것이 선생의 저작"이라 하였다. 그러나 일제하에서 저런 냉대를 받은 선생의 글은 해방 후 또 북한에서 몹쓸 꼴을 보고야 말았다.

처음에 공산주의자들은 다산 선생을 조선 최초의 공산주의자로 꼽았다. '여전제(閭田制)'가 토지를 공동 소유, 공동 경작하여 생산물을 노동일수에 의한 공동 분배를 기초로 하기 때문이라 한다. 그러나 북한에서 오히려 <목민심서>는 금서가 되었다. 이유는 <목민심서>를 연구하던 북한의 정치 세력인 갑산파와 1인 독재를 하려는 김일성이 마찰을 빚었기 때문이다. 갑산파는 김일성을 신격화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고 경제 노선도 달랐다. 갑산파는 결국 김일성에 의해 숙청당했다.

갑산파는 광의의 개념으로 보면 김일성과 함께 빨치산 활동을 했던 세력들이다. 대체로 이들은 함경도 갑산 출신으로 대다수가 갑산공작위원회라는 단체 출신들이라 갑산파라 칭해졌다. 갑산파는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를 추구하는 제국주의에 매우 비판적이었다. 갑산파의 리더인 박금철(朴金喆, 1912년~1967년)의 경우 1930년대에 김일성과 함께 조선민족해방동맹을 결성해 활동했고 보천보 전투에도 참전하였다.

특히 이들은 한국의 전통 사상에 관심을 갖고 그것을 통해 북한 사회를 이끌려 하였다. 이들은 정통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해 민족문화 유산과 실학사상에 관심을 가졌다. 여기서 갑산파가 중심적으로 관심을 가진 전통 사상가는 바로 다산 정약용이었고 그 책은 <목민심서>였다. 갑산파는 <목민심서>를 간부들의 필독문헌으로 지정, 각급 당 하위조직에 하달하였다.

최익한의 연구는 그 결정판이었다. 최익한은 선생을 체제 내부의 유교 개혁가에서 북한 사회주의를 예비한 자생적 혁명사상가로 전환시켰다. 선생 서거 120주년에는 이를 기념하는 글이 정기간행물에도 실렸다. '갑산파와 목민심서' (下)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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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헌(休軒) 간호윤(簡鎬允·문학박사)은 인하대학교와 서울교육대학교에서 강의하며 고전을 읽고 글을 쓰는 고전독작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