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스러운 국제도시 이름에 어른거리는 일제의 흔적
▲ 송도유원지 개발 전 능허대에서 바라본 '송도'의 모습.
▲ 송도유원지 개발 전 능허대에서 바라본 '송도'의 모습.

 

1920년대 옥련리 해안 송도 둔갑
침략전쟁 참전 전함과 같은 이름
해방 이후 옥련동으로 동명 교체
논란 속 지자체장 송도 밀어붙여


일제강점기는 가혹했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곳, 모든 것에 침략의 정당성을 심었다. 말도 안되는 내선일체를 강조하며 영원한 식민 통치를 노렸고, 일제의 야욕은 지금 이순간에도 한반도를 노리고 있다. 우리 삶이 피폐해지고, 정신이 혼미할 때 언제든 침략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한다. 3·1만세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은 올해, 일제 침략의 잔혹함을 다시 새겨야 한다. 특히 주변에 아직도 36년간의 일제 치하 흔적이 남았는지 살펴야 '역사 바로세우기'가 실현된다. 최근 친일파가 만든 교가를 수정하기 위한 움직임이 대단하다. 하지만 일제가 지명에 쇠말뚝을 박아 놓은 것에는 애써 돌아보려 하지 않는다. 대표적인 게 '송도'이다. 일제가 붙인 지명 '마쓰시마(松島)'. 관련 여러 설이 공존했지만 일제 지명이라는 게 정설이다. 우린 지금 '송도' 지명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송도 지명이 붙게 된 역사적 진실을 되짚어본다. 이 순간 우리의 판단에 후세의 역사는 무엇이라 기술할까.


인천 3·1만세운동의 정신적 기둥인 동구 창영초등학교(옛 인천공립보통학교) 교가를 친일 성향 인사가 작곡했다는 사실은 충격이었다.

인천시교육청과 민족문제연구소에 따르면 창영초교 교가는 작곡가 임동혁이 만들었다. 임동혁은 군국가요인 '애국일의 노래'를 작곡하는 등 일왕에게 충성하자는 내용의 노래를 다수 만들었다.
인천지역 일제 잔재는 이것뿐일까.

놀랍게도 지금 이 순간에도 인천을 대표하고, 대한민국의 상징이 되는 '송도'란 지명의 신도시가 대표적이다.

송도 지명 문제는 꾸준히 제기됐지만 바뀌지 않고 세월이 흘렀다. 일각에서는 더욱 고착화된 친일 지명 송도를 되돌리기에는 무리가 따른다며 손사래 친다. 그러나 20년 남짓 쓴 친일 지명 송도는 사회적 합의로 얼마든지 옛 지명으로 회귀할 수 있다는 의견도 상당하다.

'마쓰시마(松島)'가 어떻게 인천에 뿌리내렸는지 원류를 되짚는다.

▲ 1861년 제작된 대동여지도의 인천지역 부분. 문학산 아래 청량산이 표기돼 있고 그 왼쪽으로 능허대가 있을 뿐 송도라는 지역명은 찾을 수 없다.
▲ 1861년 제작된 대동여지도의 인천지역 부분. 문학산 아래 청량산이 표기돼 있고 그 왼쪽으로 능허대가 있을 뿐 송도라는 지역명은 찾을 수 없다.
▲ 1937년 발간된 '경승의 인천'의 송도지역(오른쪽 하단). (위쪽부터 시계방향으로)송도금강, 송도유원지, 송도해수욕장, 송도역이 표기돼 있다.
▲ 1937년 발간된 '경승의 인천'의 송도지역(오른쪽 하단). (위쪽부터 시계방향으로)송도금강, 송도유원지, 송도해수욕장, 송도역이 표기돼 있다.

 

▲松島(송도), 넌 누구냐.
"정말요? 이제서야 지명 유래를 알았네요. 일제 잔재는 당연히 청산되어야죠."

송도 주민 유지우(35)씨는 최근 송도지명의 유래를 듣고 적잖이 놀랐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이 일제가 심어 놓은 지명이란 말이죠. 그런데 왜 아직도 쓰고 있는거죠?" 되묻는다. 왜 아직쓰고 있을까.

송도가 쓰이기 전 인천의 모습은 1861년 제작된 대동여지도에서 찾을 수 있다. 김정호가 작성한 이 지도에 현 송도지명은 청량산과 문학산으로 표시됐다.

전국에 송도란 지명을 쓰는 곳은 많다. 우리말로, 솔섬인 송도는 소나무가 많은 섬을 일컫기에, 소나무를 사랑하는 우리 민족에게는 당연한 지명이다.

그러나 문학산과 청량산 앞 바다에는 아암도 외에는 섬이 없다. 더구나 매립지 송도는 섬을 근간으로 매립이 이뤄지지 않았다.

지난 2005년 9월 인천도시포럼에서는 '송도(松島) 지명, 문제점과 대안 모색'을 논했다.

1907년 5월13일 인천 일본영사관 소속 '노부오' 이사관은 본국 총무장관에게 "인천시가의 명칭은 종전대로 통칭 혹은 땅문서상의 호명으로는 불편이 적지 않아 이번에 인천시가 전부를 우리 마을 이름(일본명)을 붙이게 되었다. 우리 마을 이름을 명하는 것은 다소 온당치 못한 점이 있지만, 세월이 경과함에 따라 일반의 호칭이 되기를 희망한다"고 했다. 일제가 한일병합 전부터 집요하게 일본식 지명 박기에 나선 것을 알 수 있다.

송도로 언제부터 불리웠는지는 명확치 않다.

1918년 조선총독부 육지측량부가 제작한 인천 지도에도 '송도'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다 1920년대부터 세간에 불리워지게 된 '송도'가 '경인간의 별천지 송도'란 제목으로 매일신보 1926년 12월16일자에서 확인된다. 이 기사는 "백사청송의 절경지로 저명한 부천군 문학면 옥련리 해안의 속칭 송도는 인천을 거하기 2리 내외에 위한 터이나…"로 시작된다. 이어 1926년 12월18일 중외일보에도 송도는 지명이 아닌 당시 세간에 불리운 명칭으로 다뤄진다. 역사서 저술가 이순우씨는 "원래 우리나라에 숱하게 존재했던 송도(일본식 발음 쇼토)라는 지명에서 따온 명명방식이 아니라 일본인들이 관행적으로 많이 사용하던 '송도', 즉 '마쓰시마'의 용법에서 흘러온 것이라고 정리하는 것이 맞을 듯싶다"고 했다.

'마쓰시마(송도)'는 일본 미야기 현 중부 센다이만 연안에 산재한 크고 작은 260여 개의 섬들을 총칭하는 지명으로, 일본삼경의 하나로 꼽힌다.

조우성 전 인천시립박물관장은 "일본 삼경함 중 송도함은 일본이 인천을 교두보로 삼아 청일, 러일 두 전쟁에 참여했다"며 "두 전쟁이 인천과 관계가 깊은 만큼 인천에 그를 상징하는 정명을 여러군데 붙였고 이중 하나가 송도이다. 송도는 일본의 지명이자 전함의 이름이다"고 주장했다.

일제는 1936년 10월 인천부의 행정구역을 확장하면서 부천군의 일부였던 옥련리를 인천부에 편입시키고 그 지명을 송도정이라 바꿨고, 개통한 수인선 인근 역명이 송도역으로 되었다.

▲ 1945년 12월23일 대중일보 2면. 인천시 정명 개정위원회가 1946년부로 송도정을 옥련동으로 교체한다는 기사가 실려있다.
▲ 1945년 12월23일 대중일보 2면. 인천시 정명 개정위원회가 1946년부로 송도정을 옥련동으로 교체한다는 기사가 실려있다.

 

▲松島(송도), 인천의 운명일까.
'어운(語韻)도 그리운손 인천 새 동명(洞名)', '순수한 조선색(朝鮮色)의 76개 동(洞)', '신년부터 완전히 왜취(倭臭)를 말살하자'.

1945년 12월23일 대중일보 2면 기사 제목이다.
기사를 살펴보자.

"8·15해방 이후에도 아직 거리거리에는 가증스럽고 더러운 왜색이 일소되지 못하고 국치적인 정명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은 대단히 한심스러운 일이었다. 그리하여 시청 당국에서는 정명 개정위원회를 조직하고 수차 협의한 결과 이제 전반적으로 정(町)을 동(洞)으로 고치고 정목(丁目)을 가(街)로 개청하기로 결정되어 명년 정월 초하루부터 시행하기로 되었다. 동시에 정회(町會)는 동회로 개정된다. 그리고 새로 결정된 동명은 다음과 같다."

이 기사에는 76개의 왜색 동명을 교체했다며 대상까지 소개했다.

당시 시 정명 개정위는 송도정(松島町)을 옥련동(玉蓮洞)으로 교체했다. 인천의 송도가 일제 때 '창지개명'됐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일각에서 주장한 '옛부터 내려왔다는 설'은 대중일보 기사가 공개되며 더 이상 힘을 얻지 못하고 꼬리를 내렸다.

일제 때 작성된 지도에만 있던 송도가 드디어 해방과 함께 인천 지도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40년 만에 다시 송도가 부활했다. 어찌된 영문일까.

1990년대 초 발표된 송도신도시에 '가칭'으로 이름붙여진 매립 공사 지명은 당시 인근을 '송도'라 불렀다는 진술을 토대로 인천시가 그대로 차용해 붙였다. 그랬던게 20여년 만에 인천을 세계에 알리는 1번지 '송도'로 자리매김할 줄은 당시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일제의 쇠말뚝 정책이 인천에서 성공한 셈이다.

그 후 송도는 완전히 뿌리내렸다.

연수구는 지난 2003년 말부터 2년여를 공들여 '송도신도시'의 동명칭을 놓고 고민했다. 주민여론조사와 시민공개토론회는 물론 세 차례의 지명위를 개최했다. 그러나 2005년 7월 송도지역 동 명칭은 '송도동'으로 확정됐다.

당시에도 일제 지명 송도정을 쓰면 안된다는 의견이 상당했지만, 당시 연수구청장 등은 "송도국제도시 이름을 이제와서 바꿀 수 없다"는 힘의 논리로 밀어붙였다.

지금도 '송도유지론'은 "송도 경제자유구역은 국내·외에 고유명사가 됐다"는 입장에서 물러섬이 없다.

관련 기관과 단체들은 2014년 1월 산업통상자원부가 '송도국제도시'로 공식 명칭화 한 만큼 "지명을 바꾸게 될 경우 지명의 역사성이나 정당성과는 상관없이 향후 '투자유치와 개발사업을 추진함에 있어' 행정적 변경 절차 이행 등 대내외적으로 커다란 혼선이 발생하고 변경에 따른 막대한 유무형 비용이 발생할 것으로 우려된다"고 강조했다.

지역 정치인 역시 "친일 잔재 청산은 필요하지만 지역명을 바꾸는 것은 많은 불편함과 혼란을 야기한다"고 언급한 뒤 "일제 잔재를 사안별 분류해서 현 시점에 맞는 현실적이고 슬기로운 결정이 필요하겠다"고 밝혔다.

14년 전 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과 조우성 전 관장이 인천일보에 게재한 컬럼은 이렇게 끝난다.

"송도의 바른 이름을 찾아주는 일, 그 이름에 역사와 미래의 희망이 담겨 있어야 시민의 사랑과 함께 힘찬 발전이 시작됩니다.", "도시에서 삶과 꿈을 영위할 진정한 '신도시'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우리 고장 인천의 2세들인 것이다. (중략) 우리가 미래의 주역인 그들에게 무엇을 물려주지 못해 일제의 식민지 잔재를 되살려 유산으로 전해 주겠다는 것인가."

인천의 후손들은 우리가 내린 결정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3·1만세운동 100주년을 맞은 올해에도 일제 잔재는 인천의 삶 곳곳에 박혀 있다.

/이주영 기자 leejy96@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