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주 


선운사 골째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었습디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었습디다


이 무렵 고창 선운사에 가면 푸릇푸릇한 동백이 수줍게 밀어올린 새순과 마주할 수 있다. 그러다 4월이면 절을 둘러싼 도솔산에 붉디붉은 동백꽃이 봄 한철 활활 타오른다. 일찍이 미당(서정주)은 이른 봄 부친상을 치르고 이곳을 지나다가 비감을 달래려 선운사를 찾았다. 그러나 보고 싶던 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주막집 주모가 따라주는 막걸리 한 사발에 육자배기를 섞어 마시며 시름을 달래고 돌아갔다. 부모 잃은 아픔을 동백꽃이라 해도 어찌 달래줄 수 있으랴마는, 어쨌든 맛깔 나는 이 시는 그렇게 탄생했다.
동백은 '청렴'과 '진실한 사랑'을 상징하는 꽃이다. 꽃잎이 다 붙은 채로 목이 뚝뚝 부러져 떨어지는 이 꽃은, 제 목을 산 채로 떨쳐내는 결기의 꽃이다. 생각하면 참 무서운 꽃이다. 전생에 무슨 잘못이 있어 저토록 아름다운 꽃을 피운 뒤 제 목을 스스로 내치는 것일까. 어쩌면 가장 아름다울 때 모든 것을 내려놓음으로써 헛된 성형미만 추구하는 세상에 경종을 울리려고 한 것은 아닐까.
청렴한 세상은 되었으나, 진실한 아름다움이 점점 사라지는 이 시대에 동백이 그리워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리라. 따뜻한 봄햇살이 더 깊이 스며들면 진정한 사랑을 위해 제 목을 베는 꽃, 동백을 찾아 선운사나 한번 찾아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혹시 아는가. 메케한 미세먼지를 씻어 내릴 풍천장어 한 저름에 주모의 걸쭉한 육자배기 사랑가라도 한 소절 들을 수 있을는지.

/권영준 시인·인천부개고 국어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