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 만세운동 재현.


1959년 7월31일 오전 10시30분, 서울 서대문형무소 2사 상15 감방을 나온 그는 당당하게 형장으로 들어갔다. 백발 희끗한 재소자는 허리를 꼿꼿이 폈고 형형한 눈빛에 머리칼 한 올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렇게 그는 의연하게 한 많은 삶을 형장에서 마쳤다.

그 후 산비둘기 한마리가 몇날 며칠을 그가 머물던 감방의 창살로 날아와 슬프게 울었다고 전한다. 그가 감방에서 새에게 모이를 주며 대화를 한다는 소문이 이미 형무소 내에 퍼졌던 터라 이상할 것도 없었다. 한낱 미물인 산비둘기도 그의 안타까운 죽음을 슬퍼했던 것이다.

그는 바로 죽산 조봉암 선생이다. 인천에서 태어나 김구 선생과 함께 항일 독립운동사에 위대한 족적을 남겼다.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초대 농림부장관을 지내는 동안 농지개혁을 주도해 일제와 결탁한 자본가들에게 수탈당하며 살아온 농민들에게 새 삶의 희망을 주었던 장본인이다.
올해 인천시의 3·1절 기념식에서 죽산 조봉암 선생의 유족이 추모 헌시 낭독을 맡았다. 이것은 왜곡되고 잊힌 역사를 바로 세우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이날 창영초등학교에서 동인천역으로 이어진 '대한독립만세'의 외침은 그 어느 때보다 인천인들의 가슴에 메아리쳐 와 닿았다.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일을 없애고 모든 사람의 자유가 완전히 보장되고, 모든 사람이 착취당하는 것이 없이 응분의 노력과 사회적 보장에 의해서 다 같이 평화롭고 행복스럽게 잘 살 수 있는 세상, 이것이 한국의 진보주의라 해도 좋을 것입니다." 진보당 창당사에 나타난 조봉암 선생의 정치 철학은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한 지금,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굵직한 메아리다. 선생의 죽음을 슬퍼했던 그 죽산조(竹山鳥)가 또 다시 슬피 우는 암울한 역사는 되풀이 되지 말아야 한다.

/포토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