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후손 찾기, 기록 찾기도 독립운동이다
[사설] 후손 찾기, 기록 찾기도 독립운동이다
  • 인천일보
  • 승인 2019.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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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오동진. 1919년 3·1운동에 적극 가담 후 만주 관덴현으로 망명해 광제청년단을 조직했다. 1919년 단둥 현에서 대한청년단연합회를 조직하고 대중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1922년 군정서·통군부·한교민단·대한독립단 등을 통합하여 대한통의부를 결성하고 교통부장·재무부장·민사부장 등을 담당했다. 1924년 군사부장 겸 사령장이 되어 남만주의 일본민회·보민회 등을 습격했다. 1925년 정의부 군사부위원장 겸 총사령관에 취임하여 차련관주재소 등을 습격하는 한편 친일주구를 제거했다. 1929년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복역하다 1944년 옥사했다. 백과사전에 기록된 오동진 선생의 약력이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선생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선생의 훈장은 후손에게 전해지지 못했다. 후손 없이 순국했거나,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했거나, 제적부가 소실된 탓으로 국가가 수여한 서훈을 받고도 전달되지 못한 사례가 부지기수다. 국가보훈처 자료에 의하면 무려 5713명에 달한다. 독립유공자들의 기록 또한 허술하다. 김여근(1887, 애족장)선생은 1919년 4월3일 화성에서 일본순사를 처단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됐다. 남공필(1863, 애족장)선생은 1907년 8월 10일 의병에 참여해 광주 일대에서 수차례의 군자금을 모집하다 적발돼 수감됐다.

그러나 이들이 어디서, 어떻게 순국했는지 알 수 없다. 더 이상의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서다. 독립운동 공적이 발견돼 국가가 서훈을 수여한 이들 가운데서도 단편적인 기록만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하물며,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독립에 헌신한 민초들의 사라져간 기록들은 또 얼마나 많겠는가.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전국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다. 만세운동을 재현하거나, 동상 제막식을 하는 것도 매우 의미 있고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그에 앞서 독립유공자들의 후손을 찾아 보상하고, 묻혀 있는 기록들을 찾아 명예로운 역사를 복원하는 일 또한 놓치지 말아야 한다.
단순히 행사에 치중하기보다 독립운동을 기념하고 계승하는 진정한 방식이 무엇인지를 따져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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