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환 논설위원

1970년대 초 어느 봄날, 열두어살 먹은 한 소년이 부산의 부산진역 광장을 배회하고 있었다. 한때 만석꾼 소리를 듣던 고향 김해에서 한순간에 가세가 기울어 무작정 도회지로 나온 집안의 아이였다. 어려서부터 소리에 끼를 보였던 소년은 그 곳에서 떠돌이 행색의 소리 스승을 만나게 된다. 동부민요의 달인이었던 그 스승은 끼가 엿보이는 소년 제자에게 영남 메나리조 소리의 진수를 전수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소년의 가정 형편에 고교진학도 버거웠다. 그런 그에게 한가닥 빛이 비춰졌다. 1974년 문을 연 국립부산기계공고였다. 반드시 최고의 기술자가 되어 집안을 일으키겠다는 꿈으로 밤새도록 쇠를 깎았다. 쇠를 깎으면서도 쉬지않고 동부민요를 연마했다. 각고의 노력 끝에 그는 30대 초반에 일본에서도 일감을 받아내는 정밀기계업체를 일으켰다. 40대 초반에는 한양대 공대에서 공학박사를 따고 금형제작기술 부문의 대한민국 명장에 올랐다. 공부와 사업에서 성취를 이룬 그는 어려서부터의 꿈인 동부민요의 부활에 뛰어든다. 사재를 들여 후학들을 키우고 뉴욕 카네기홀 무대에도 진출했다. 동부민요 '명창' 박수관의 성공 스토리다.
▶대한민국이 중화학공업에 드라이브를 걸던 1970년대, 각 지역마다 거점 국립 공고를 세워 기능 인재 양성에 나섰다. 인천의 인천기계공고, 구미의 금오공고 등도 그 때 '공고 전성시대'를 이끌었던 인재 양성소였다. 인천기계공고 출신들 중에도 위의 박수관 사장 못지 않은 성공 스토리들이 많다.
▶학비는 거의 무료 수준이었다. 시골에서 올라온 학생들에게는 부모 부담이 큰 하숙·자취 대신 기숙사가 제공됐다. 아무런 걱정없이 공부와 기술 연마에만 정진할 수 있는 환경이 제공됐다. 이른바 '시골 수재'들이 이들 학교로 몰려들었다.
▶언제부턴가 이런 학교들이 이름도 생소한 '특성화고'로 불리고 있다. 공고나 실업계 학교라는 이름이 '공돌이'를 연상케 할까 봐 바꾼 모양이다. 그런데 요즘 중학생들은 이런 특성화고에 시큰둥하다고 한다(인천일보 2월22일자 19면). 정원을 줄여도 해마다 미달이다. 충북의 한 특성화고에서는 신입생 특별전형에 '지원자 0명'을 기록했다. 신입생 유치에 바쁜 교사들은 "아무리 얘기해도 요즘 세대에는 잘 안먹힌다"는 것이다.
예삿일이 아닌 것 같다. 우리 청소년들이 모두 '기름밥'을 천시하는 것 같아서다. 세계 최고 수준의 대학진학률은 앞으로 갈수록 더 많은 문제들을 파생시킬 것이다. 과거 한 시절, 가난하지만 머리 좋은 학생들로 뜨거웠던 '공고'들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