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 피 땀 … 파업과 폭압올해 의미 살릴 방안찾아야

일제강점기 수탈의 현장에서 대한민국의 근대화를 이끌었던 인천항. 인천항은 1910년 한일 강제병합 이후 일제의 대륙침략 병참기지, 수탈의 통로, 항만노동자들이 피 흘린 현장이었다. 빛나는 인천항과 개항장 뒤편에는 부흥의 흔적과 함께 우리 민족의 아픔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3·1 운동·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이하는 올해는 인천항의 의미를 살릴 방안을 찾아야 할 시기이기도 하다. ▶관련기사 3면

28일 인천항만공사(IPA)가 발간한 '인천항사'에 따르면 인천항 무역액(수출·수입 합계)은 1910년 1672만2000엔(圓·조선 원·일제 식민지 화폐)에서 1939년 3억6741만7000엔으로 40배 커졌다. 당시 인천항 주변은 최대 공업지역이자 상업 지역이었고, 많은 사람과 물자가 오가는 관문이라 무역액 확대도 필연적이었다. 무역도 대부분 일제에 종속돼 있었다.

인천항에서 수출되는 상품은 대부분 곡물을 중심으로 한 농산물이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일제의 곡물 공급량 중 6%가 조선미였다고 한다. 쌀이 인천항을 통해 대거 빠져 나가면서, 우리 민족은 만주 좁쌀을 수입해 먹을 수밖에 없었다. 병참기지화가 급속도로 진행된 건 1938년 조선총독부 선언 이후였다. 중화학·제분·방직공장들이 들어섰고 생산품도 잇따라 일본으로 수출됐다.
일제강점기는 작은 부두였던 인천항이 급격하게 커진 시기이기도 하다. 한일 강제병합 직후인 1911~1918년 인천항에 갑문선거 축조공사가 시작된다. 해수면 높이에 상관없이 배가 들어설 수 있도록 전체 길이 165m, 측벽높이 15m, 갑거길이(문 사이 거리) 129m의 갑문이 완성된다. 백범 김구 선생이 노역했던 인천항 제1선거(현 내항 1부두)도 이 때 완성된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설비확장공사가 이뤄졌고, 북항개발사업도 진행된다.

일제강점기 인천항은 노동자의 피와 땀이 서린 곳이었다. 일거리를 찾아 전국에서 사람이 몰려 들었지만, 일본노동자보다 훨씬 낮은 임금과 유래 없는 장시간 노동으로 인간 이하의 착취를 당하곤 했다. 1920년 조선노동공제회 인천지회, 1922년 조선노동연맹, 1924년 인천선미여공조합·하역인부조합 등 직업별 노동조합이 설립되면서 일제와 싸우기 시작한다. 일제는 잇따라 일어나는 파업을 폭압적으로 진압했다.
아픈 역사는 1945년 광복과 1950년 한국전쟁을 거쳐 대한민국 근대화를 이끈 초석이 된다. 한 항만 업계 관계자는 "인천항은 근대화를 이끈 핵심 시설이지만, 일제강점기 수탈의 통로였다는 역사를 잊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박진영 기자 erhist@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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