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서 받아들인 구국의 운명 "내 소원은 대한독립"

 

김란사
女 최초 문학사·고종 밀사 활약

하상기
인천부윤 … 부인 김란사 지원

김구
인천서 수감 … 백범일지 서술
항일운동가로 사상을 정립

홍진
만국공원서 도대표자대회 참석
임시의정회 의장 세 차례 역임

이동휘
강화서 의병조직 계획 세우다 유배
합일학교 설립·임시정부 국무총리

100년 후 인천
청년 김창수 역사거리 조성 계획
독립운동·유공자 공훈 시설 정비3월1~3일 김란사 생애 관련 무대

 

▲ 황해도 장연 광진학교 교사 재직 당시의 김구.
▲ 황해도 장연 광진학교 교사 재직 당시의 김구.
▲ 1919년 4월 전국 13도 대표들이 모여 임시정부수립을 결의한 장소 만국공원.
▲ 1919년 4월 전국 13도 대표들이 모여 임시정부수립을 결의한 장소 만국공원.

 

인천은 열린 곳이다.

외세의 침탈은 인천에서 시작돼 잔인하고 집요하게 전국으로 뻗었지만 그 때마다 인천은 분연히 일어섰다.

인천 원주민은 물론이요, 인천에서 구국의 운명을 받아들인 인물도 많다.

모두 인천인이요, 우리가 기억하고 기념하고 기려야 할 위대한 인천의 유산이다.

지금, 인천은 어떤 모습일까. 뒤돌아보고 성찰해야 할 때이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은 올해. 인천에서 대한독립의 꿈을 위해 분골쇄신한 인천인을 돌아보자. 인천에서 나고 자라진 않았지만, 인천에서 '독립'이란 단어를 가슴 깊이 새긴 김란사와 하상기, 김구, 홍진, 이동휘 선생을 인천은 품어야 한다.

▲ 고종의 밀사 김란사
▲ 고종의 밀사 김란사
▲ 김란사의 남편 하상기
▲ 김란사의 남편 하상기

 



















▲ 김란사와 하상기

1893년, 인천에서 김란사·하상기는 꿈을 꿨다.

풍전등화인 조국에 등불이 되겠다는 각오. 그 열의는 김란사에 교육을 통한 계몽의 뜻에 불을 지폈고, 하상기는 음지에서 보이지 않는 조국 해방의 밑거름이 됐다.

마지막까지 고종이 믿고 의지한 두 사람. 아쉽게도 김란사는 이국에서 생을 마감했고, 하상기는 여전히 생몰이 불분명하다.

당시 하상기는 인천 감리서 별감으로 일했다. 그들 생은 1년 만에 격랑에 휩싸인다. 근대사 중 가장 긴 한해인 1894년, 갑오농민운동과 청일전쟁에 이은 갑오개혁. 김란사는 교육의 중요성에 이화학당을 찾고, 1895년 일본 유학, 1897년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우리나라 여성 최초 문학사가 된다.


사육신 하위지의 자손인 하상기는 1899년 인천감리 겸 인천부윤 주임관에서 1902년 인천감리 겸 인천부윤이 됐다.

하상기는 인천에서 세 번의 관직에 있으면서 열강의 침탈과 쓰러지는 대한제국을 목도했다. 김란사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으며 대한제국의 칼이됐고 1919년 일제에 잡혀 1년간 옥고를 치렀다. 같은해 김란사는 고종의 밀서를 품에 안고 파리강화회의 참석할 계획이었지만 북경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을 지낸 백범 김구
▲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을 지낸 백범 김구

▲ 김구

1945년, 조국이 광복됐다.

중국에서 독립운동 후 귀국한 김구, 그는 지방 중 인천을 가장 먼저 찾았다. 김구는 두 차례 인천에서 감옥 생활을 했다.

1896년 '치하포사건'이 처음이다.

명성황후 시해 소식에 김구는 일본군 중위 쓰치다를 살해해 그해 5월13일 사형 선고를 받고 해주감옥에 수감됐다가 7월26일 인천감영으로 압송됐다.

외국인 업무를 처리하던 인천감영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고종 황제의 사형 집행 정지령으로 무기수로 감형됐고, 1893년 3월19일 탈옥한다. 당시 인천감영에서 독립의 뜻을 품었고, 강화도에서 민족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했던 김구. 김창수는 김구가 됐다. 김구는 중구 용동 마루턱~시흥방면 소로~벼리고개(부평에서 만수동 방향 고개)~부평~양화도~남대문~청파(동)를 거쳐 은신에 성공했다.

1911년 안악사건(안명근사건)으로 서대문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하다 1914년 인천감옥으로 이감됐다.

죄수번호 55호, 김구는 인천항 부두에서 건설노동을 했고, 1915년 가출옥된다. 백범은 백범일지에 '인천감옥에서 수형생활을 하는 동안, 인천 개항장을 통해 유입된 신문물을 익히며 항일운동가로서의 사상을 정립했다'고 기록했다. 인천에는 백범 동상이 인천대공원과 부평여중에 있다. 백범 동상 이전을 위한 사회 물결이 한창이다.

▲ 임시정부 국무령 만오 홍진
▲ 임시정부 국무령 만오 홍진

▲ 홍진
1946년 9월9일 만오 홍진 선생이 눈을 감았고, 문학산 기슭에 그의 무덤이 조성됐다. 1994년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로 이장될 때까지 그가 인천에 묻힌 것은 '인천'에 대한 애정 때문이다. 홍진의 장의위원장은 백범이 맡았다. 홍진은 백범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의회격인 임시의정회 의장을 지냈다.
홍진은 1919년 4월2일 만국공원에서 13도대표자대회에 참여했다.
1919년 3월17일, 법조인 만오는 종교계 인사 이규갑 등과 서울 광화문 옆 검사 한성오 집에서 '한성정부' 조직안을 논의했고, 국제적 상징성을 감안해 한성정부 수립을 인천 만국공원에서 공포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내에서 13도 대표가 창설한 한성정부를 계승할 것"을 선언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모태가 된 한성정부, 그는 1926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냈고, 임시의정원 의장을 세 차례 역임했다. 자유공원에서 홍진의 자취는 찾을 수 없다. 홍진의 묘비는 인천시립박물관 수장고에 잠들어 있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 이동휘
▲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 이동휘

▲ 이동휘
함남 단천의 지방 하급관리 아들로 태어난 이동휘, 한성무관학교를 졸업했고, 1907년 한국군이 강제 해산될 때까지 참령으로 강화진위대를 이끌었다. 일제 강압에 의한 군대해산에 분노, 1909년 3월 군대 동지 연기우(延其羽)·김동수(金東秀) 등과 더불어 강화도 전등사에서 의병을 조직할 계획을 세우다가 잡혀 유배됐다. 그는 강화진위대장으로 있으면서 합일학교를 설립했고, 개성·평양·원산 등지에 여러 학교를 설립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를 지냈다.
이동휘는 강화군의 인물로 재평가되고 있다. 강화에서 군인으로 활동했고, 무장투쟁에서 교육가로 강화에 72개의 학교를 세웠다. 일제의 거센 탄압에 강화를 떠났다.

▲ 인천문화예술회관은 3월1~3일  '100년 후, 꿈꾸었던 세상'을 선보인다. 여성 독립운동가 김란사의 생애를 그린 공연으로 사진은 '제작 발표회' 당시 모습.  /이상훈 기자 photohecho@incheonilbo.com
▲ 인천문화예술회관은 3월1~3일 '100년 후, 꿈꾸었던 세상'을 선보인다. 여성 독립운동가 김란사의 생애를 그린 공연으로 사진은 '제작 발표회' 당시 모습. /이상훈 기자 photohecho@incheonilbo.com

 

▲100년 후 독립의 꿈 되살아나다.

인천에서는 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기념해 다양한 사업이 진행된다.

가장 눈에 띄는 사업은 청년 김창수 역사거리 조성사업이다.

중구 신포로 일부구간(내동 83번지 인근)에 걸쳐 조성될 청년 김창수 역사거리는 김구의 청년시절 인천감리서 투옥 및 탈옥, 이후 재투옥 등 김구의 인천 행정을 재조명하고 인천감리서 터 정비 및 탈출경로에 역사거리를 조성하는 것이다.

인천감리서 터 표지판 정비와 주변 환경정비, 벽화조성, 80m 인도가 조성될 계획이다.

한성정부와 인천이 다큐멘터리로 제작되고 있다.

국내 유일의 임시정부였던 한성정부를 선포한 인천, 100년 전 4월 인천 만국공원에서 한 한성정부 수립 이유와 만국공원이 장소로 선택된 이유 등이 나온다.

인천시는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독립운동 관련 시설 또는 독립유공자 공훈 시설물을 정비 중이다. 지역 9곳으로 동구 창영초등학교의 3.1독립운동 인천지역발상지와 강화의병전투지(전등사) 등이다.

또 3월1일부터 3일간 '100년 후, 꿈꾸었던 세상'이란 제목의 인천시립예술단 합동 공연이 열린다. 김란사의 삶을 배경으로 한 이 공연은 김란사의 어린 시절부터 1919년 생을 다할때까지가 담긴다.

/이주영 기자 leejy96@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