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사상을 읽다 … 귀족을 때리는 '글'에서

 

▲ 연암의 소설 <양반전>을 각색해서 1966년에 만든 영화 '양반전' 포스터.

연암 선생은 "남을 아프게도 가렵게도 못하고, 구절마다 쓸데없이 노닥거리기만 하고 이런들 저런들 흐리터분한다면 이런 글을 장차 어디에 쓰겠는가?(言不痛不 句節汗漫優柔不斷 將焉用哉)"(박종채 <과정록>)하였다. 모쪼록 독자들이 가렵기라도 했으면 좋겠다. 반남박씨(潘南朴氏) 문중회의는 끝났다.

<연암집>을 간행하려던 연암의 손자 박규수(朴珪壽, 1807~1876)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박규수의 나이 55세, 그해에 연행사로 중국을 다녀왔다. 할아버지 연암이 44세에 열하를 다녀왔으니 그만큼 견문이 늦은 셈이다. 연암이 간 길을 70여년 만에 걷는 감회란, 연행한 사람 모두 <열하일기>를 언급하며 박규수에게 이것저것을 물었다.

북경에서 사귄 문인들은 박규수의 글이 할아버지 글에 잇대고 있음을 보고 매우 반겼다. 그리고 1865년 2월 박규수가 정 2품 자헌대부에 가자(加資)되고 연암은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박규수는 이 일을 계기로 <연암집> 간행을 실행에 옮기기로 하였다. 아버지(연암의 아들로 이름은 박종채)가 모아 놓은 <연암집>은 문고 16권, <열하일기> 24권, <과농소초>15권 등 총 55권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으로만 그쳐야 했다.

규수의 동생 선수(瑄壽,1821~1899) 역시 1864년(고종 1) 증광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한 이후 관직에 올랐다. 그는 사간원대사간, 암행어사, 이조참의, 성균관대사성을 거쳐, 갑신정변 직후에는 공조판서, 형조판서 등을 지냈으나 그도 그뿐이었다. <연암집> 간행은 이후를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연암의 글은 박규수에 의해 이미 갑신정변의 싹을 틔우고 있었다. 그 해가 1869년, 63세인 박규수는 평양감사로서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해결하고 중앙 정계로 복귀했다. 그는 박영효, 김옥균 등 조선을 이끌 인재를 선별하여 문하에 두고 <연암집>을 강독하기 시작한다.

김평묵(金平默,1819~1891)은 "박규수 재상은 그의 조부 지원 이래로 외국의 학문 연구를 깊이 했다. 늘 말할 때 외국의 사정에 이르면 반드시 정신이 편안해 지는 듯했다. 서인(西人) 후배들 중에 조금이라도 재주가 있어 그의 문하를 출입한 자면 모두 그의 의논을 계승하였는데 그들 대개가 나랏일에 참여했다"(<중암별집> 권10, 부록124쪽)고 적바림해 놓았다.

박규수의 <연암집> 강의 여운은 15년 뒤, 1884년 12월 4일(음력 10월17일) 우정국 낙성식 축하연을 계기로 현실로 나타났다. 연암이 이승을 하직한 지 79년 된 해였다. 갑신정변은 조선 역사상 왕권을 무너뜨리고 국민주권국가 건설을 지향한 최초의 정치개혁운동이었다.

개화당 김옥균(金玉均, 1851~1894)·박영교(朴泳敎, 1849~1884)·박영효(朴泳孝, 1861~1939)·홍영식(洪英植, 1855~1884)·서광범(徐光範,1859~1897)·김윤식(金允植, 1835~1922) 등이 청나라에 의존하는 척족 중심의 수구당을 몰아내고 개화정권을 수립했다. 비록 3일천하였지만 갑신정변은 조선의 근대화를 앞당기는 역사적 소명은 충분했다.

"그 신사상은 내 일가 박규수 집 사랑에서 나왔소.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그리고 내 백형(박영교)하고 재동 박규수 집 사랑에 모였지요. … 박규수는 연암 박지원의 손자로서 재동집에 있었는데 김옥균 등 영준한 청년 등을 모아 놓고 <연암집>을 강의하였소. … <연암집>에 귀족을 공격하는 글에서 평등사상을 얻었지요."

이광수(李光秀)가 갑신정변을 "조선을 구미식 신정치사상, 자유민권론, 오늘날 말로 봉건에서 부르주아로 이행하려는 신사상으로 혁신하려던 대운동"으로 정의 내리고 혁신사상이 유래한 경로를 물은 데 대한 박영효의 답변 정리이다.

연암의 글이 갑신정변의 동인이니 그만큼 혁신사상이란 말이다. 갑신정변의 주역들이 박규수의 문하로 모여든 연암주의자들이란 말이다. 귀족을 공격하는 글은 <양반전>, <호질> 따위의 연암소설 일체와 <열하일기>임은 굳이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글이란 이토록 나라를 뒤집어엎을 만큼 무섭다. 물론 무섭게 써야 하지만 말이다.

#추신: 박규수 문하의 제자들은 조선으로서, 또 연암학을 공부한 제자로서, 공과 실이라는 측면에서 살필 필요가 있다. 박규수의 제자들 모두 조선의 개화를 이끈 선각자들이라는 긍정적인 면과 그들 중, 상당수는 친일 행위를 한 부정적인 면 때문이다.

<지면 관계로 이만 략(略)한다. 샅샅이 톺아나가면서 연암 글을 독(讀)해도 시원찮은데 맹물에 조약돌 삶듯 독(讀)한 듯하여 연암 선생께 죄만스럽다. 후일을 기대해본다. '연암 편'은 이번으로 마친다. 다음부터는 '다산 정약용 편'을 4회에 걸쳐 연재한다.>

 

▲ /휴헌(休軒) 간호윤(簡鎬允·문학박사)은 인하대학교와 서울교육대학교에서 강의하며 고전을 읽고 글을 쓰는 고전독작가이다.

 

 

 

 

 

 

 

 

 

 

/휴헌(休軒) 간호윤(簡鎬允·문학박사)은 인하대학교와 서울교육대학교에서 강의하며 고전을 읽고 글을 쓰는 고전독작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