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문종 경기지속가능발전협의회 감사


마을에 주목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마을은 시민이 일상을 살아가는 삶의 현장이고, 미래세대가 태어나서 성장하는 교육의 전당이다. 직장에서 물러나 존중받으며 노후를 살아갈 공간이기도 하다. 뿌리를 내려 생존을 이어가는 터전이 마을이다. 마을이 건강하지 못하면 시민의 생활이 병이 든다. 풀뿌리가 부패하면 민주주의는 꽃피울 수 없다.

시민의 안전을 지키고 기본 생활을 보장하려면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마을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 쾌적하고 풍요로운 마을에서 시민의 행복이 시작된다. 포용사회로 가는 길은 마을에서 출발해야 한다. 세계화라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지속가능한 삶을 이어가는 길은 마을에 있다. 마을이 세상이다.

마을은 움직이며 변화한다. 공간도 바뀌고, 마을 사람의 생활방식도 변화한다. 농촌사회의 마을공동체와 산업사회의 마을은 같지 않다. 도시로 집중되는 인구를 수용하기 위해 마을은 최고층 아파트로 전환된다. 이전과는 다른 마을이 만들어지고, 그곳에 적응해야 한다. 30~40년 전에 중심이었던 마을이 새로이 구축되는 여러 중심에 둘러싸인 주변이 된다. 대부분을 자급하던 공동체가 지금은 사람을 빼고는 거의 전부를 외부에 의존하는 공간으로 전락했다. 마을이 심각한 병을 앓고 있다. 더 늦기 전에 마을을 살펴야 한다.

2000년, 새천년이 시작되면서 읍면동에는 주민자치위원회가 설치 운영됐다. 주민자치라는 이름만 보면 새천년에 걸맞은 시작이었다. 하지만 그 탄생과정은 그리 영예롭지는 않았다. 풀뿌리 민주주의를 튼튼하게 만들기 위해서 혹은 주민 자치 능력이 자라나서 마을을 자치적으로 운영하게 하려는 목적에서 출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좀 엉뚱하지만 주민자치위원회는 중앙정부-광역시도-기초시군구-읍면동으로 이어지는 4단계 행정체계를 개편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후보시절에 내건 공약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기구가 주민자치위원회였다. 4단계 행정체계 중 광역이나 기초 행정단위를 개편하고자 하였으나, 강한 반발이 있어 후퇴하여 읍면동 행정을 반으로 줄였다. 행정이 독점하던 동사무소의 반을 주민을 위해 주민자치센터로 만들고, 그 운영을 주민자치위원회에 맡겼다. 동정자문위원회나 개발위원회가 사라지고 멋진 이름을 가진 주민자치위원회가 만들어진 것이다.

우연적 계기지만 행정이 독점하던 마을활동에 주민 참여를 확대하고, 자치영역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풀뿌리 주민자치활동은 짧은 우리나라 민주주의 역사 속에서도 꽤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5·16 군사정권으로 막을 내린 제2공화국 시절에는 읍면동장까지 주민이 직접 뽑았던 시절이 있었다. 1987년 6월 민주화 열기가 거리를 덮고 있을 때, 시민과 학생이 외쳤던 구호 중 하나는 '동장부터 대통령까지, 내 손으로 뽑아보자'였다. 주민자치 역사는 이미 오래된 미래였다.
주민자치위원회가 처음 등장했던 초기에는 여러 혼란이 있었다. 1990년대부터 시작된 마을학교나 마을만들기, 녹색아파트학교 등 마을 활동이 시작되었으나, 아직은 일부 주민과 지역만의 활동에 머물렀다. 동원에 익숙하였던 마을 주민에게 주민자치위원회는 낯선 선물이었다. 그러나 지방자치제가 정착되고 시민의식이 성장하면서 주민자치 활동도 크게 발전해왔다. 형식적인 주민자치위원회 활동을 하는 마을은 뒤처지고, 여러 주민이 참여하며 능력을 키워가는 마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민선5기가 시작되면서 시민참여, 마을만들기 사업은 지방자치단체의 중요 사업으로 자리 잡았다. 마을사업은 민선6기, 민선7기를 거치면서 지금은 어느 사업보다도 큰 비중을 차지한다. 중앙정부도 주민자치 분야만이 아니라 복지, 문화, 교육, 경제 분야에까지 마을 중심의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2013년 시범사업으로 시작된 주민자치회가 이제 본격적으로 추진된다. 시범사업을 통해 경험을 쌓아온 여러 지역에서 '동장 주민선출제', '마을계획과 주민총회', '주민자치활동의 플랫폼, 주민자치회' 등을 내걸고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마을사업을 통해 성장한 마을 활동가들이 주민자치회에 관심 갖고 참여하고 있다.
행정안전부도 지난 해 지방자치법 전면 개정안을 발표하면서 주민자치회의 전면 실시를 위한 법적 장치를 마련하겠다고 약속했다. 동원과 통제의 시기를 상징하는 동정자문위원회, 과도적 주민 활동을 보여주었던 주민자치위원회가 마을의 시대를 이끌어 갈 주민자치회로 전환하고 있다. 이 전환을 올바로 인식하고 발 빠르게 대응해 나가는 지방자치단체가 우리 사회를 선도해 갈 것이다. 지속가능한 지역 발전과 성숙한 민주주의가 꽃피는 사회를 만들고 싶다면 주민자치회를 주목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