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민초들의 목숨 건 외침 '대한독립만세'
▲ 1 며칠전 내린 눈이 아직 녹지 않아 강화읍 합일초교 운동장 한켠에 쌓였다. 이 모습을 이 학교의 초대 교장이자 민족교육자인 최상현 동상이 내려 보고 있다.

 

▲ 3 황어장터 3·1운동만세기념관은 평상시 찾는 이가 드물다. 이 곳에서는 심혁성의 독립 의지를 읽을 수 있는 사료와 13m에 이르는 기념탑이 서 있다. .

 

 

▲ 2 잠두교회(현 강화중앙교회)가 백년 전 강화 독립만세 현장을 묵묵히 지켜 봤다. 죽산 조봉암 선생이 이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 4 잠두교회에서 위쪽으로 5분정도 오르면 용흥궁 공원 내 '강화 3·1운동 독립기념비'가 우뚝 서 있다.

 

▲ 인천 출신 독립운동가 조봉암 선생.

 

▲ 황어장터 3·1운동 주역 심혁성 선생.

 

▲ 5 창영초교는 인천의 첫 공립보통학교이다. 창영초교 앞에는 동창회가 세운 독립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 5 창영초교는 인천의 첫 공립보통학교이다. 창영초교 앞에는 동창회가 세운 독립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길직·선두·잠두교회 - 합일학교
기독교인들 독립선언서 등 배포
합일학교엔 조봉암 선생 발자취


황어장터
13m 넘는 기념탑 … 독립 성지 상징
독립운동가 심혁성 일경에 체포돼

인천공립보통학교
전화선 끊어 경찰서 연결 차단 등
서울 시위에 동맹휴업으로 호응


며칠 전 내린 눈의 잔상이 남아 있다. 정월대보름이 지났고 대지가 새봄에 꿈틀댈 때지만 겨울의 마지막 생채기는 매섭다. 춘래불사춘이다.

20일 오후 1시30분, 강화군 강화읍 합일초등학교 운동장에는 십 수명의 아이들이 눈놀이에 함박웃음이다.

겨울방학이 끝났나, 아. 돌봄교실 중이겠구나. 이 아이들은 100년 전 강화 곳곳에서 벌어진 민중봉기를 상상할 수 있을까.

솜털이 가시지 않고, 꿈과 희망으로 가득차야 할 100년 전 이 땅의 꽃망울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던 결연함은 어디서 왔을까.

옛부터 이 땅의 민중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나라의 고난에 들불이 됐다.

특히 구국의 도시, '인천' 선열은 타 지역의 수 백배에 달하는 함성을 이 땅에 토해냈다. 합일초교 운동장에서 한 학생이 외친다. "돌봄선생님이 그만 놀고 들어오래".

이러한 일상의 평화가 바로 3·1독립운동이 닦은 터에 세워진 대한민국이라 감사하다. 100년 인천의 3대 3·1 만세운동의 현장을 둘러봤다.

▲강화봉기, 민초가 일어서다
강화는 위대하다. 때마다 조국 수호에 팔을 걷어붙였다. 혼이 살아 숨쉬는 강화 곳곳에 3·1운동의 흔적이 남아 있다.

강화는 종교와 함께 3·1운동이 일어났다. 장날을 이용해 장터, 향교 등으로 이동하며 만세를 불렀고 길상면 길직교회와 선두교회, 잠두교회의 기독교인들은 서울의 만세운동 소식을 접하고 독립선언서와 국민회보 수백 매를 인쇄해 배포했다. 1919년 3월18일 강화읍 장날 만세운동에 모인 시위대가 2만명에 달한다.

한달이 넘도록 강화는 대한독립만세가 곳곳에 울려퍼졌다. 학생들은 칠판에 태극기를 그렸고, 3·1운동 1년 후에도 백지에 독립만세란 글씨와 태극기가 강화에 펄럭였다.

읍내에는 그 때의 함성을 뒤로 하고 분주하다.

차들이 빈번하고, 행인의 발길은 거침이 없다. 강화 견자산에 세워진 강화 3·1독립운동기념비는 용흥궁 공원으로 옮겨졌다. 옆에는 성공회교회가, 앞에는 용흥궁, 뒷동산은 고려궁지와 외규장각을 만날 수 있는 목 좋은 곳이다. 평일임에도 주차장이 만차인 만큼, 오가는 관광객의 발길은 한 번쯤 이 곳에 멈춰 강화의 조국혼을 느낄 수 있으리라.

걸어서 5분, 강화잠두교회를 찾았고, 바로 옆 합일학교를 만났다. 옛 모습은 잊혀졌지만 죽산 조봉암 선생의 발자취와 함께 인천이 잊지말아야 할 독립운동가 이동휘의 숨결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잠두교회 부설학교로 시작한 합일학교는 민족의식이 고취된 곳, 이 학교 최상현 교장의 피땀이 서린 이 곳. 현재 최 교장상은 볕 좋은 곳에서 학교를 뛰노는 아이들을 인자하게 바라보고 있다. 강화공립보통학교에서는 1919년 3월12일 3·4학년이 칠판에 태극기를 그리며 만세를 불렀다.


▲황어장터, 인천 민중의 독립의지

인천지역 만세운동의 도화선이 된 황어장터. 잉어를 매매한 장이 섰던 곳이란 지명, 이 곳을 기억하는 어르신은 강서 최대 우시장을 떠올린다.

소울음소리, 장터의 왁자지껄 흥겨움이 더했던 황어장터. 그 곳에서 인천 3·1운동은 시작됐다. 황어장은 3, 8일 장으로 하루 1000명이 모였다고 한다.

인천시 계양구는 황어장터의 만세운동을 기리기 위하여 2004년 2월 기념관 조성에 착공해 같은 해 8월15일 준공했다. 시설은 총 1115㎡의 면적에 전시실과 기념탑, 연못과 황어조형물, 관리실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황어장터 3·1만세운동기념관과 기념탑이 세어진 이 곳은 동네 한 가운데 자리했다. 열평 남짓한 기념관은 하루 한 두명 찾는 이가 전부지만, 의지가 꿈틀거리는 심혁성의 강렬한 눈빛과 황어장터 시위에서 일경에 체포된 독립운동가의 모습을 사진으로나마 만날 수 있다. 또 13m가 넘는 황어장터 기념탑은 이 곳이 독립의 성지임을 증명 하고.
황어장터 만세 운동은 1919년 3월24일 오후 2시쯤 심혁성이 주도하는 가운데 300여 명의 만세운동으로 시작됐다.

일경이 칼을 휘둘러 이은선을 사망케하며 민중의 분노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장기택지개발지구가 둘러싸고, 아파트 단지와 주택가로 변한 황어장터.

독립운동사자료집에서 찾은 심혁성의 내용. 경기도 부천군 계양면(桂陽面) 오류리(梧柳里) 거주하는 당시 32세(8월15일생) 심혁성의 직업은 농업. 일제의 조선총독부 검사 수야중공(水野重功)의 공소 내용은 이렇다.
"심혁성은 전부터 일한합병을 좋아하지 않고 항상 조선독립을 희망하고 있던 바, 대정8년(1919년) 3월1일 천도교주 손병희(孫秉熙) 등이 조선민족독립선언을 한 다음 조선 각지에서 독립시위운동이 시작되자 그 취지에 찬동하여 이와 동일한 행동을 하려고 동년 3월24일 오후 2시 경 경기도 부천군 계양면 장기리 시장에서 태극기(증 제1호)를 휘두르며 그 곳에 모여든 군중을 선동하여 같이 조선독립 만세를 절규함으로써 독립시위운동을 함으로 말미암아 치안을 방해했다."

▲굳은 결의,인천공립보통학교

인천은 일찍이 외세가 군침을 흘렸다. 부산과 원산에 이어 1883년 개항장이 된 인천, 외세가 뜯어낸 빗장은 거침없이 인천을 통해 물산을 뺏어갔고, 노동력을 착취한 것도 모자라 민족의 혼마저 뭉개려 천인공노할 행위를 일삼았다.

1919년 인천. 인구 2만211명 중 44.4%인 8973명이 일본인이었을 정도라면 인천은 일본이 맘먹고 한반도 착취의 중심지요, 대륙침략의 교두보로 삼으려 했음을 읽을 수 있다.

인천의 독립 의지는 학생으로 시작됐다.

지금 동구 창영초등학교는 공사가 한창이다. 캐노피를 설치하려는 듯 분주한 일꾼의 손길에 인천 최초의 공립보통학교는 새롭게 변신 중이다. 겨울방학 학생 발길이 끊긴 곳은 새단장으로 분주하다. 새학기 창영의 후배를 맞을 준비에.

1919년 3월8일 오후 9시. 인천 공립보통학교(현 인천 창영초등학교) 3학년생 김명진·이만용·박철준·손창신 등은 학교 건물 2층에 몰래 들어갔다가 미리 준비한 절단용 가위로 전화선을 끊어 경찰서와 연결된 통신을 차단했다. 교직원들이 이틀 전 시작된 학생들의 동맹휴업 사실을 경찰에 알리는 등 독립운동을 방해한 데 대한 저항으로, 이 일로 징역형을 받은 김명진은 일경에 "내 나라 독립을 위해 한 점도 부끄럽지 않다"고 외쳤다.

인천 3·1운동은 1919년 3월6일 인천공립보통학교 학생들에 의해 시작됐다. 이 학교 학생들은 서울의 독립운동 만세 시위에 동맹휴업으로 호응했다.

인근 조선인 가게는 '조선독립신문'과 함께 격문을 배포했고, 철시를 단행했다. 그해 4월 2일 만국공원(현 인천 자유공원)에서는 박용희·장붕·김규·이종욱·이규갑·홍면희·안상덕 등이 조선국민대회를 열었다. 1995년 이 학교 동창회가 세운 '3·1 독립운동 인천 지역 발상지' 기념비, "모교선배님들의 고귀한 애국충정을 길이 빛내고 후학들에게 나라사랑의 교훈을 삼고자 이 비를 세운다"고 새겨진 글에서 100년 전 독립 의지를 다시 떠올린다.

/글·사진 이주영 기자 leejy96@incheonilbo.com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