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묵 인천콘서트챔버 대표

그리 멀지 않은 140여 년 전, 1883년 제물포가 개항됐다. 2년 후 기독감리교 선교사 미국인 아펜젤러(1858~1902)가 이 땅을 밟

 

으면서 서양음악 즉 양악이 본격적으로 전파됐다. 물론 여러 나라의 문화가 쏟아져 들어오며 국내 양악의 화촉을 점화하였지만, 전도를 위한 개신교 찬송가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외래 음악이 익숙하지 못한 당시, 양악은 우리 정서에 맞게 변형되어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았다.
양악을 수혈받던 우리는 오늘날 그들의 음악을 재가공하여 역수출하고 있다.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 우승의 피아니스트 조성진부터 그래미 시상식 입성의 쾌거를 이룬 아이돌 방탄소년단까지. 크고 작은 승전고를 울린 자랑스러운 한국인이 적지 않다. 이것이 우리 음악의 현주소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음악이 이처럼 발전하기까지 수많은 사연이 있었다. 다시 시간을 거슬러 모든 것이 혼돈이었던 일제 강점기, 당시 음악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1910년 국권 피탈로 본격적인 일제 강점기가 시작된다. 하지만 일본은 그전부터 이미 다양한 작업을 해왔다. 제도적으로는 교과 과정에서 일본 음악 교과서를 채택하고, 음주로 인사불성 되어서도 일본 노래를 흥얼거리게 하는 등 풍습까지 관여했다. 제국주의 선전도구와 민족혼을 빼앗기 위한 수단으로 음악을 선택한 것이다. 음악이 민족 정서의 주춧돌이라는 것을 간파한 행보였다. 안타깝게도 일본의 이러한 움직임에 동참한 국내 여러 인사가 있다. 우리는 그들을 친일반민족행위자, 다시 말해 친일파라 한다.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편찬한 친일인명사전에는 40여 명의 음악가가 등재되어 있다. 학창시절 한 번쯤 불러본 우리의 동요를 만들거나 음악 교과서를 편수한 작곡가들이 대거 포함되었다.

우리는 어떤 것이 친일파의 노래인지 나아가 친일 음악이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이 학창 시절을 보냈다. 음악 교육 제도까지 관여한 그들의 손길이 해방 후 별다른 조치 없이 이어져 온 결과다.
당시 유행가도 마찬가지다. 대중성을 바탕으로 제국주의 선동 주축이 된 음악, 주로 징병제를 찬양하여 국군 가요를 만들거나 일제 강점의 정당화를 노래했다. 더욱더 안타까운 것은 해방 후 이런 노래를 개사하여 일부 군가로 사용했다는 점이다.

사실 이에 반대하는 애국 음악도 존재했다.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는 항일운동이 음악에서도 존재했다. 이를 항일음악이라 부른다. 현재 안익태 애국가가 있기 전까지 10여 편의 애국가가 있었고, 대부분 일제 강점기 전부터 불린 음악이다. 자주독립과 민족국가 수립의 염원을 담은 애국계몽의 항일음악인 것이다.
혁명가, 독립가, 반일가요 또한 마찬가지다. 이는 해방을 맞이할 때까지 나라 안팎에서 불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당시 염원과 주권을 노래한 음악이 무엇인지 또 누가 창작하였는지조차 알지 못하고 배우지 않았다. 이것 또한 친일 음악 교육 제도에서 이어진 안타까운 현실이다. <진짜 사나이>, <행군의 아침> 군가가 친일 음악가의 작품이고 <여우야 여우야>, <꼭꼭 숨어라>, <두껍아 두껍아> 등 우리의 놀이 음악이 본래 일본 전통 동요라는 것을 누가 상상이나 하였겠는가.

끈질기고 지독하게 깊이 스며들어 청산되지 못한 채 이어지는 일제 강점기의 잔재들. 친일 문화를 들추어내는 일은 피할 수 없는 과제다. 하지만 결단과 강단이 필요하다. 일제 문화 잔재에 대한 발굴과 연구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인식해야 한다. 왜색풍의 겉치장이면 의미 없이 배척하는 것이 아닌 근본적인 일제 잔재의 개념과 내용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미 정서로 굳혀진 잔재를 쉽게 털어내기엔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 문화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는 중요한 과업이다.
올해는 3·1 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다. 이를 핑계로 우리 사회는 이 같은 발굴과 연구를 묵묵히 진행해온 분들에게 유행처럼 관심을 가진다. 시간이 흘러 그들의 노고가 우리의 무관심으로 사라지는 괴변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게 새집 다오." 우리가 버려야 할 헌집과 반겨야 할 새집의 경계가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