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준 인천대 중어중국학과 교수

얼마 전 중국의 '4대 고도(古都)' 중 하나인 시안에 다녀왔다. 송 이후에 고대 제국의 수도가 카이펑, 베이징, 난징 등지로 옮겨가면서 시안의 전성기도 지나갔지만, 오랜 세월 동안 제국의 수도로 기능해오면서 쌓인 역사의 흔적은 여전히 방문자를 압도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백미는 아무래도 병마용일 것이다. 진시황이 수많은 인력과 물자를 동원하여 진흙으로 실물 크기의 도용 수천 개를 만들어 사후의 지하세계에서 자신을 호위하게 했다는 이야기는 중국에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병마용은 중국의 고대 문화유산을 대표하는 유물이 되어, 오늘날 수많은 국내외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있다.

2월 초, 이곳을 방문했을 때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수많은 인파로 인해 입장에만 한참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가이드의 추천대로 아예 오후 늦게 입장객이 줄어들면 들어가기로 하고, 일단 주변에서 병마용을 주제로 한 공연을 보며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공연의 제목은 '진용정(秦俑情)'으로, 우리나라에서는 1990년에 개봉된 영화 '진용(秦俑)'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이다. 영화는 시공을 초월하는 남녀 간의 사랑을 주제로 삼았고, 지금은 세계적인 영화감독이 된 장이모우가 젊은 시절에 남자 주인공으로 주연한 작품이기도 하다.

처음부터 공연 관람을 목적으로 간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무런 사전 정보도 없었고, 공연의 내용도 대동소이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극장에 들어갔다. 그러나 공연이 시작되고 채 10분도 지나지 않아,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공연의 주인공은 불사약을 먹고 병마용이 되어 세월을 넘나드는 사랑에 빠진 남자가 아니었다. 공연은 처음부터 끝까지 진시황의 시각에서 전개됐다. 공연의 전반부는 천하를 통일하는 과정에서 진시황이 직면한 개인적인 고뇌를 조명하면서, 그가 왜 수많은 인명을 희생하면서까지 천하를 통일했는지 보여주려 했다. 후반부는 진시황의 천하 통일로 인해 분열과 혼란이 종식되고, 중국 문명이 '위대한 발전'을 이루게 되었음을 강조하는 내용이었다. 도대체 제목을 왜 '진용정'으로 정하였는지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공연 중간에 등장하는 병마용과 현대 여성 사이의 사랑을 보여주는 장면도 도무지 극과 어울리지 않을 정도였다.

영화 '진용'의 로맨스는 공연 '진용정'에서는 곁가지로 밀려났다. 공연 '진용정'은 진시황을 고대 중국 문명의 토대를 닦은 위인으로 묘사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고, 병마용은 단순히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1990년대부터 중국 사회 곳곳에서 강조되고 있는 '애국주의'가 진시황과 병마용을 소재로 삼아, 3D 기술과 화려한 볼거리가 더해져 찬란하게 전시되고 있었다.
사실 진시황만큼 역사적으로 극과 극의 평가를 살아온 인물도 별로 없을 것이다. 진이 무너지고 한이 중국을 통일한 이후로 진시황은 대표적인 폭군으로 평가받아왔다. 한에서는 유학을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삼으면서, 엄격한 법치주의를 시행한 진시황을 일종의 반면 사례로 삼았다. 진시황은 유가에서 강조하는 '덕'을 갖추지 못한 군주였고, 책을 불태우고 비판자들을 생매장하는 무자비한 통치자로 기억됐다. 유교 관념이 사람들의 가치관을 지배했던 시절에 이러한 이미지는 확고하게 자리 잡았고,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진시황의 이미지도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정작 중국에서는 20세기에 들어와 유교가 비판의 대상이 되면서, 그와 함께 진시황에 대한 재평가도 부분적으로 이루어졌다. 마오쩌둥의 평가가 가장 대표적인 예이다. 그는 진시황을 중국을 정치·사회·경제·문화 등 모든 방면에서 최초로 통일한 '위대한 군주'로 묘사하였고, 자신을 진시황에 비견하기도 했다. 공산당 집권 아래, 특히 문화대혁명 시기에 유교와 공자는 '구악(舊惡)'이 되었고 진시황이 재평가됐다.
현재 중국에서는 이와는 조금 다른 맥락에서 진시황이 재평가되고 있다. 마오쩌둥 시절에는 혁명과 이데올로기의 관점이 중요했고, 진시황에 대한 역사적 평가도 그 맥락에서 이뤄졌다. 하지만 지금 중국에서는 혁명이나 이데올로기가 아닌, '위대한 중화 문명'을 앞세우기 위하여 진시황이 활용되고 있다. 특정 인물과 사건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시대와 공간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지만, 우리는 그것이 어떤 정치적·사회적 맥락에서 이뤄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