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애 인천대 소비자아동학과 교수

어릴 적 동네에 살던 '김○○'씨의 이름을 아직도 기억한다. 동네 사람들이 매일같이 이용하던 슈퍼와 그 건물, 내가 다니던 피아노학원이 있던 건물도, 버스정거장 뒤편에 쭉 늘어선 상가건물을 포함해 푸른 잔디가 깔린 넓은 정원이 있는 흡사 드라마 속 부잣집 대저택과 같던 그의 집까지. 우리 동네 최고 부자 하면 단연 김○○의 이름을 누구나 댈 만큼의 재력이었다. 그랬던 그가 갑작스럽게 죽자 그의 아들이 최고 부자가 된 직후부터 건물들이 하나씩 팔린다는 소문이 돌았고, 마지막으로 그의 집이 여러 채의 빌라로 바뀌게 된 순간 우리 동네 최고 부자는 더는 김○○씨의 아들이 아니었다.

김○○씨의 집이 헐릴 때부터 상당 기간 동안 우리 어머니는 김○○씨가 재산 증식을 위해서만 노력했지 자식 교육에 소홀해 학력이 낮았고, 그 아들이 결국 그 많은 재산을 지키지 못했다 하시며 자식 교육이 최우선이라고 자주 말씀하셨다. 물론 고백하건대 그런 어머님의 순수한 자식 교육 의지에 상응하는 노력을 기울이는 착한 딸이 되는 것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 지금 와서 새삼 죄송스러울 따름이다.

내 학창시절의 결론이야 어쨌든 연일 화제를 모았던 'SKY 캐슬'이 현재 우리나라 교육 현장의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얼마 전 종영했다. 그 드라마는 교육을 통해서 열심히 노력하면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고, 자식 교육을 위해 투자하고 희생하면 다음 세대는 자신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거라는 우리나라 부모들의 막연하고 그럴싸한 믿음이 얼마나 큰 착각일 수 있는지에 대해 가감 없이 보여주었다.
즉 우리 사회가 교육을 통해 능력을 쌓고, 그 능력이 성공을 보장하게 될 거라는 단순한 논리, 그 단선적인 조합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사회라는 사실을 모두 이미 알고 있으면서 누구도 쉽게 인정하지 않아 주저하는 우리의 비겁함을 꼬집은 것 같아 불편했다.

만약 극 중 인물들이 SKY로 대변되는 일종의 학력자격증인 일류 대학 입학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부모들의 노력만을 연기했다면 과연 이런 불편함과 씁쓸함을 느꼈을까. 분명 그렇지 않을 것이다. 자식의 미래와 성공을 위해 부모로서 최선을 다하고 실질적인 투자와 지원을 통해 자식을 책임지려는 자세가 설령 드라마의 흥미를 위해 조금 왜곡되고 과장되었다고 한들 그 극성스러운 노력 자체 때문에 이렇게 불편하진 않았으리라. 살벌한 입시교육 한복판에서 마치 현실감각이 없는 듯 주변의 과도한 사교육을 비판하며, 입시지옥에서 허덕이는 아이들이 불쌍하다고 강변하는 극 중 동화작가인 우주 엄마의 그 순수함이 오히려 민폐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어쩌면 오늘날 우리 교육의 결과가 같은 출발점에서 동시에 시작해서 능력을 겨루는 장거리 달리기 시합을 통해서가 아닌 부모와 함께 뛰는 릴레이 경주를 통해서 결정된다는 명약관화한 사실을 혼자만 부정하는 우주 엄마의 모습이 공감을 얻지 못했기 때문일 수 있다.

이제 케케묵은 우리의 그릇된 믿음의 짐을 내려놓을 때이다. 교육을 통해 개인의 능력을 극대치로 끌어올릴 수 있게 되면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설계된 현재의 사회시스템이 과연 적정한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
우리의 오래된 믿음처럼 개인적 차원에서의 선택과 책임을 통해 교육이 이뤄지고 그 결과 생애 전반에 걸쳐 한 사람의 사회경제적 성공과 직결될 가능성이 크다면, 우리는 매번 교육이라는 달리기 경주를 통해 새로운 순위를 정할 기회가 제공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교육이라는 투자가 지속되는 것에 의미가 있다.
그러나 앞서 제시했듯이 현재 우리의 교육 결과는 앞 주자의 달리기 성적이 고스란히 나의 순위에 반영되고 또다시 나의 성적이 다음 세대의 결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릴레이 경주와 같기 때문에 교육을 통한 경제적 보상시스템의 설계는 지금의 모습과는 많이 달라져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이전 세대가 이미 벌여 놓은 거리를 개인의 노력을 통해 교육으로 얼마든지 역전할 수 있다고 믿는 달리기 주자가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실제 경주 결과를 통해 역전의 기쁨을 맛볼 수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의 교육이 SKY 캐슬에서 그려졌듯 부모세대가 누리던 사회적 계층을 상속시키는 매개체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전적으로 인정해야 한다. 자녀 교육에 투자할 수 있는 부모의 경제적 능력이 교육에 투자하고자 하는 과거 우리 어머니의 순수한 의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해진 오늘날 과연 현실에서 드라마의 훈훈한 엔딩을 연출하기 위해 무엇이 가장 시급한지 생각해볼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