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민중 '동맹 휴학·파업' … 일제 만행에 항거
▲ 합일학교는 1901년 잠두교회(현 강화중앙교회)에서 설립한 잠두의숙에서 출발했다. 합일학교는 1920년대 강화군민들이 힘을 합쳐 민족교육을 지켜낸 곳이다. /사진제공=독립기념관

 

▲ 문학초등학교 내 남은 인천도호부 청사.

 

▲ 동일방직에 남아있는 당시 건물들.

 

▲ 합일학교 내 당시 최상현 교장 동상.


부천공립보통학교, 日교장 민족모욕에 학생들 일어서

조선성냥공장, 열악한 女노동자 처우개선 얻어내

가토정미소·동양방직, 조선인 폭행 맞서 2000여명 투쟁

합일학교, 학생·주민에 항일민족정신 전파

강화·길상공립보통학교, 교원들 탄압에도 항일의지 드높여


3·1운동 이후부터는동맹휴학이 자주 일어났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일제측 분류에 의한 동맹휴학의 원인은 ▲학교 시설·교규·교칙·학과배정 등에 기인하는 맹휴 ▲교사 배척에 관한 맹휴 ▲지방 문제에 관한 맹휴 ▲기타의 학교 내부 및 학생 상호 간의 일에 관련된 맹휴 ▲ 민족의식 및 사회주의 사상의 발현 등에 기인한 맹휴 등으로 나뉜다.

1929년 세계를 강타한 대공황과 이에 맞춰진 일제의 군국주의화로 침략과 수탈이 악랄해졌다. 개항장 인천은 전국에서 가장 먼저 노동자계층이 형성됐고 산업도시와 병참기지화가 복합적으로 추진되며 노동자가 크게 늘었다.

그에 따른 노동문제와 노동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며 일본인과 투쟁을 거듭했다. 일제의 만행에 결연히 인천 민중이 일어섰다.


▲부천공립보통학교 동맹휴학지

1922년 6월 일본인 교장의 민족모욕과 차별에 항거 부천공립보통학교생 200명이 동맹 휴학한 곳.

- 1922년 6월22일 일본인 교장 미야우치의 한인교사 및 한인학생에 대한 민족모욕과 차별에 항거하며 2·3·4·5학년 학생 200여 명이 11가지 조건을 내걸고 군청과 경기도청 학무국에 진정서를 제출하고 동맹휴학을 결행했다.

진정서 내용은 '교장은 학교에 성의가 없어서 학과를 시간대로 가르치지 않고, 학생들을 조선인이라는 관념을 두고 공연히 때리고 모욕한다는 것, 또한 학교에 고용된 인부에게 자기 집 잡일을 시키고, 학교 졸업생이 기부한 풍금을 자기 집에 가져가 쓰며, 조선인 선생에게 교장 집의 가사 노동을 시킨다는 것'이다.

인천시 미추홀구에 가장 먼저 생긴 초등학교는 인천문학초등학교이다. 이 학교는 1917년 9월20일 부천공립보통학교로 설립 인가를 받아 1918년 4월29일에 4년제로 개교했다. 1939년 인천부 개편으로 이 지역이 인천으로 속하게 되자 인천문학공립보통학교로 개명했다. 하지만 부천 지역 대표적 동맹휴학지임에도 기념표석 등이 없다.


▲조선성냥공장 동맹파업지

1920년대 인천 조선성냥공장의 여성 노동자들이 저임금과 근로개선을 요구하며 동맹파업을 벌인 곳.

- 성냥은 1880년 개화승(開化僧) 이동인(李東仁)이 일본에 갔다가 수신사 김홍집(金弘集)과 동행 귀국할 때 처음으로 성냥을 가지고 들어왔다고 알려져 있다.

인천 최초의 성냥공장은 1917년 10월 금곡리에 설립된 조선인촌주식회사였다. 인천에 성냥 공장이 들어선 것은 경인 지역의 넓은 시장과 압록강 일대 삼림지에서 생산되는 목재 원료를 배편으로 쉽게 들여올 수 있는 이점 때문이었다.

이 회사는 신의주에 부속 제재소까지 두었고 직원도 남자 200명, 여자 30(0명 등 총 500여명으로 패동(佩童), 우록표(羽鹿票), 쌍원표(雙猿票) 등의 성냥을 연간 7만 상자를 생산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인천의 조선성냥공장은 일본인들에 의해 설립돼 운영됐다. 일의 특성상 여성들이 많이 고용됐다. 그러나 성냥개비 1만개에 60전이라는 낮은 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으로 인해 노동자들의 처우 개선 요구는 민족적 저항의식과 연계돼 조직적인 동맹파업으로 발전했다.

1921년 마침내 인천 조선성냥공장 여직공 150여명은 일본인 지배인을 배척하며 파업했다. 1926년 4월2일 성냥공장 노동자 200여 명은 회사에서 임금을 삭감하려 하자 동맹파업을 일으켰다.

이에 사주 측은 인천경찰서 고등계 형사의 위력을 빌려 주동자 수명을 검속하며 파업의 열기를 꺾고자 하였으나 단결한 노동자는 계속 투쟁을 전개했다. 결국 4월29일 회사측이 노동자들의 요구조건을 수락하면서 한달 가량 지속된 동맹파업은 일단락됐다.

이후 1932년 5월2일 노동자 360명은 오전 10시 임금인하 반대, 8시간 노동제를 내걸고 동맹파업에 돌입했다. 현 동구 금곡동 송림오거리 인근 조선성냥공장은 사라졌고, 재개발돼 원래 형태를 알 수 없다. 일인자본에 의한 노동착취를 조직적으로 대항한 곳인 만큼 자료로 남겨놓고 향후 활용 때 기초자료로 삼아야 한다.


▲가토정미소·동양방직 동맹파업지

1924년 11월27일 인천 가토정미소 여성 노동자들이 일인 검사원과 업자의 폭언·폭행에 항의해 동맹파업을 벌인 곳, 1936년 인천 동양방직 노동자 2000여명이 처우개선을 요구하며 동맹파업을 한 곳.

-1924년 11월17일 종업원이 500명이나 되는 가토(加藤)정미소에서 쌀 고르는 일을 하던 여직공 이씨는 일본여자 검사원에게 쌀에 겨가 섞여 있다는 이유로 구타를 당했다. 이에 직공들이 사주에게 항의를 하자 사주는 오히려 이씨의 질이 좋지 않다며 다시 구토와 폭언을 했다. 그러자 직공 400여 명이 검사원의 해고를 요구하며 동맹파업 실시를 결의하자 경관이 출동하는 등 사태가 악화되는 듯 했다. 그러나 곧 검사원이 해고되어 직공들은 업무에 복귀했다.

가토정미소 외에도 인천 소재 정미소에는 일본인의 노동착취에 저항하는 동맹파업이 자주 일어났다. 이는 정미 직공과 쌀을 고르는 선미공의 근무조건이 휴일 없는 1일 10시간 노동에 저임금으로 매우 열악했기 때문이었다. 현재 가토정미소가 있던 궁정은 인천시 중구 신생동으로, 대형마트가 세워졌다.

1933년을 전후해 설립된 동양방직 인천공장은 일본에 본사를 두고 섬유 및 화학제품을 가공하는 회사였다.

조선인 노동자의 처우 문제가 개선되지 않는 상태에서 1935년 1월17일 조선인 노동자 구타사건이 발생해 직공 30여 명이 동맹파업을 전개했다. 이어 1936년에는 노동자 2000여 명이 식사 등 처우개선 문제로 동맹파업을 준비하자 회사 측에서는 주동자 12명을 해고했고, 또한 인천경찰서는 노동자 7명을 검속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노동자들은 1937년 1월29일 동맹파업을 하며 조직적으로 회사에 항의함과 동시에 처우개선을 요구했다.

조선중앙일보 1936년 3월18일자에 관련 내용이 자세히 나왔다. 또 동아일보 1932년 7월16일자에 인천부 만석정에 수면을 매립해 공장 부지를 확장하고 공사비 4만2000원을 확보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1966년 1월 회사명을 동일방직으로 변경했으나 같은 위치에 공장이 운영되고 있다. 이 곳에는 일제 건물구조를 지닌 옛 건물들이 사내에 있다.


▲합일학교 터

1920년대 강화군민들이 힘을 합쳐 민족교율을 지켜낸 교육운동 장소.

- 합일학교(合一)는 1901년 미국인 감리교 선교사 조원시(G.H.Jones)와 박능일 목사가 설립한 강화 최초의 사숙(私塾)으로 학동 3명으로 시작했다. 1909년 4년제로 인가받고 1923년 4월 신효승·최상현 두 사람의 노력으로 총 공사비 1만2400원을 들여 2층 양옥을 신축했고, 1924년 2월 '신교육령'에 의해 6년제로 됐다.

합일학교는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학생들에게 태극기를 보여줘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등의 교육을 했다.

이로 인해 교사인 강홍석이 일제 경찰에 여러 번 불려가 고초를 겪기도 했다. 이 학교는 여학생과 유년교육에 앞장서 지역사회의 폭넓은 지지기반을 갖고, 주민후원회와 확고한 재정 기반으로 투철한 항일민족정신을 주민들에게 전파했다. 최상현 교장과 그 뒤를 이은 오영섭 교장은 모두 3·1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인물들이다.

현재 이 곳은 합인초등학교로 운영 중으로, 교내에는 최상현 선생 동상이 있다.


▲강화·길상공립보통학교 동맹휴학지

1919년 강화보통학교 3·4학년들이 만세운동을 벌이고 1925년과 1928년 학교 교원의 폭력에 항거해 강화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단행한 곳. 1926년 순종 승하 후 일본의 복상(服喪) 탄압으로 길상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벌인 곳.

- 1919년 3월12일 강화공립보통학교 3·4학년 학생들이 칠판에 태극기를 그리고 만세를 부르며 운동장에 나가려 하였으나 교장과 교직원에 제지당했다.

13일 다시 100여 명이 학교 안에서 만세를 부르자 경찰이 진압해 남학생 10명과 여학생 반장을 연행했다.

이후에도 학교장을 비롯한 훈도와 학생들 간의 긴장 관계는 계속 이어졌다. 1925년 6월 강화공립보통학교 5학년 학생 70여명이 훈도 이기하의 폭언과 부당한 실습연장 요구에 저항해 강화성 서문 누상에서 회합하고 동맹휴학을 단행했다.

1926년 6월 일본인 교장이 2학년 학생을 도둑으로 몰아 이틀간 학생을 구타해 정신이상이 오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에 강화지역 사회단체가 합심해 군청 등에 문제를 제기해 일본인 교장을 징계토록 했다. 강화공립보통학교는 1898년 성내을종보통학교에서 일제강점기 강화공립보통학교로 변경됐다.

1926년 4월30일 길상공립보통학교 6학년생들이 순종의 승하 소식을 듣고 봉도(奉悼)를 위해 발에 상장(喪章)을 두르고 등교하자, 이쿠타 교장과 교사들이 이를 저지하며 이인무·고효순·김성동·김갑룔 등 10여 명을 사무실로 데려가 마구 구타해 심한 부상을 입혔다.

다음날 5학년 학생들도 상장을 하고 등교했는데 전날과 같이 학생들이 구타를 당하자, 학생들은 일본인 교사 배척을 주장하며 동맹휴학을 단행했다.

학생들의 동맹휴학에 학부모들은 긴급회의를 열어 일본인 교장과 교사에 대한 규탄을 했다. 그러나 학교에서 봉도식을 마친 다음날인 6월11일부터 6학년 학생들은 재차 등교를 거부했고, 이에 5학년생들도 동조해 동조휴학을 했다. 또 학부모들도 일인 교원의 해임을 강력히 촉구하며 항일의지를 높였다.

/이주영 기자 leejy96@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