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환 논설위원


올해 100주년을 맞는 3·1절이 다가오고 있다. '3·1절 노래'의 시는 본인도 그 날의 의거에 앞장섰던 위당 정인보 선생이 썼다. '태극기 곳곳마다 삼천만이 하나로/이 날은 우리의 의(義)요 생명이요 교훈이다/한강 물 다시 흐르고 백두산 높았다.' 이보다 더 절절한 평가는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1969년은 3·1운동 50주년의 해였다. 그해 '상해임시정부'라는 영화가 개봉됐다. 까까머리 중학생의 기자도 '문화교실'을 통해 단체 관람했다. 백범 김구 선생의 파란만장한 독립운동 자취를 그린 영화였다. 상하이 훙커우 공원의 거사장으로 떠나는 윤봉길 의사와 백범 선생의 작별이 압권이었다. 백범이 "윤 동지, 저승에서 만납시다"라고 하자 윤 의사는 "선생님의 낡은 시계를 품고 가겠다"며 서로 시계를 바꾼다. 이 장면에선 철부지들의 눈에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올해 100주년을 맞아서는 최재형(1860∼1920) 선생이 재조명되고 있다. 이미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됐지만 냉전시대에는 가려져 있었다. 항일독립투사들 중에서도 선생은 특별하다. 나라의 덕이라고는 받아본 적 없는 최하층민 출신이다. 그러면서도 수만금의 재산과 생명까지도 조국독립의 제단에 쏟아붓고는 일본군의 총탄 앞에 산화했다. ▶함경도 노비와 기생 사이에서 태어난 선생은 아홉 살 때 두만강을 건너 연해주로 이주한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블라디보스톡의 부두를 헤매다 러시아인 선장을 만난다. 상선의 선원으로 세계를 두 번 도는 항해를 마친 표토르 세메노비치(선생의 러시아 이름)는 유통·군수사업으로 거부로 성장한다. 이때부터 선생은 러시아 한인사회의 버팀목이 된다. 어려운 이민살이의 동포들을 살뜰히 살피고 38곳의 한인학교를 세운다. 동포들과 독립투사들이 그를 부르던 '페치카 최'는 한없이 따뜻하고 뜨거운 사람이라는 뜻이다. ▶윤봉길 의사 뒤에 백범이 있었듯 안중근 의사에게는 최재형 선생이 있었다. 국내진공을 목표로 한 의병조직 '동의회'를 결성하면서 안 의사를 만난다. 이토 히로부미를 처형하러 떠나는 의사에게 8연발 브라우닝식 권총 두 자루를 건넨 것도 선생이었다. 수만금을 독립운동에 바친 선생은 1917년에 이르러서는 거처할 집 한 채도 없게 된다. 1920년 4월, 3·1운동과 청산리 전투 등에 자극받은 일본군은 연해주로 쳐들어 와 닥치는 대로 한인들을 살육하는 '4월 참변'을 저지른다. 우수리스크에서 체포된 선생은 탈주 도중 일본군의 총격에 당한다. 하층계급 출신의 지극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이런 선열들 때문에라도 대한민국은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