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서 '우리 민족 아픔' 마주하다
▲  옛 제물포구락부 건물. 일본인의 친목회 장소이자 외국인을 위한 사교회장으로 사용 되었다.

▲ 옛 인천 일본영사관이 인천이사청으로 바뀌었고 인천부청으로 바뀌었다. 인천부청 간판의 옛 건물.

▲ 일제강점기 일본인 신사.

▲ 제물포구락부 건물 현재 내부 모습.

▲ 옛 인천 일본영사관터. 현재 인천 중구청 건물.

▲ 동공원 터에 남아있는 옛 신사석

1905년 11월17일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한 대한제국, 1906년 조선 황실의 평화를 유지한다는 명분으로 한국 통치기구인 '통감부'가 설치되며 한일병탄은 현실화됐다.

그리고 제3대 한국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1910년 8월16일 당시 총리대신 이완용을 비밀리 만나 합병조약안을 제시했고, 1910년 8월22일 형식적인 회의를 거쳐 한일합병조약을 통과시켰다. 한국민의 반발을 두려워한 일제, 정치단체의 집회를 철저히 금지하고 원로 대신들을 연금한 뒤 1910년 8월29일 조약을 공포했다. '적법한 비준 절차를 무시하고 일제의 강압 속에서 진행된 국제법상 무효인 불법조약이다'.

한일합병조약 제1조를 아는가. 바로 "한국 전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제에게 넘길것"이다. 36년간의 일제강점기가 시작됐다. <국가보훈처>

일제강점기는 1910년 8월29일부터 1945년 8월15일까지이다.

일제강점기는 '헌병 경찰 통치기(무단 통치기)'(1910년~1919년), '문화 통치기'(1919년~1931년), '민족 말살 통치기'(1931년~1945년)로 나뉜다. 그러나 해방이 됐어도 한동안 조선총독부는 유지됐고, 이후 미군정이 세워졌다. 무단 통치기 때까지 치열한 독립운동을 벌였지만, 문화 통치기를 넘기며 상당수가 변절했고, 민족 말살 통치기 때 혼을 뺏기기까지 했다.

▲옛 제물포구락부
1901년 건립된 일본인의 친목회 장소이자 미국·영국·독일·러시아 등의 외국인을 위한 사교장으로 사용된 곳.

- 1883년 제물포항 개항 당시 미국·영국·독일·러시아·청국 등의 외국인과 일본인들은 교류 필요성에 사교 모임을 조직했다.

옛 제물포구락부는 양철 지붕을 덮은 벽돌식 2층 건물로 러시아 건축가 아파나시 세레딘사바틴이 설계해 1901년 6월22일에 문을 열었다.

구락부는 영어 클럽(club)의 일본식 발음을 한자로 차용한데서 붙여진 명칭이다.

내부에 바와 테이블 등을 갖춘 사교실, 도서실, 당구대 등이 있었고 실외에는 테니스 코트가 있었다.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사교장의 기능과 함께 일본의 조선침략에 따른 이권은 물론 서구 열강의 치열한 외교전의 무대가 됐다.

당시 회원은 서양인 6명, 중국인 4명, 일본인 24명으로 구성됐다. 1913년 조계가 철폐되자 일본재향군인연합회로 이관됐고, 명칭도 정방각(精芳閣)으로 바뀌었다. 이후 1930년대에는 일본인 중심의 120~130명의 회원을 유지하면서 격월로 강연과 환송·경조 등 사교를 중심으로 일본인의 친목 교류를 강조했다. 1934년에는 일본 부인회관으로 사용됐다.

이 건물은 1945년 광복 이후 미군 장교클럽됐고, 그 후 문화원, 박물관 등으로 이용되다가 2007년 6월에 리모델링을 거쳐 외국인 사교와 인천의 개항을 이야기로 풀어나가는 스토리텔링 박물관으로 활용 중이다. 인천시 유형문화재 17호.


▲옛 인천 일본영사관 터

조선에 대한 수탈적 행정과 자국민 보호 등을 위해 설치된 일본영사관이 있던 곳.

- 1883년 10월31일 일본은 인천에 영사관을 설치했다. 영사관 내에는 인천항 일본경죄재판소를 두고 영사재판을 집행했다.

일본은 1905년 을사늑약 체결로 한국의 외교권을 장악했다. 을사늑약 3조에는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는 일본정부 대표로 통감을 두고, 개항장 및 필요한 곳에 통감의 지휘 하에 기존 영사의 권한을 행사하며 협약과 관련된 사무를 처리할 이사관을 두는 내용이 포함됐다.

인천이사청은 1906년 설치됐다. 1910년 일제강점 이후에는 지방제도의 개편으로 일본인 거주지가 있던 지역이 '부(府)'로 지정되면서 이사청의 업무는 부청으로 이관됐고, 대부분의 이사청 청사도 부청 청사로 바뀌었다. 중구 응봉산 중턱에 자리한 옛 인천영사관은 권위를 상징했다.

영사관 건물은 1906년 인천이사청으로 바뀌었고, 1910년 인천부청으로 사용했다.

이후 1932년 구식 목조건물을 헐고 지금과 같은 철근콘크리트 구조의 2층 규모로 신축했다. 인천시청으로 쓰이다 현재 인천 중구청사로 활용 중이다.

▲옛 인천경찰서 터

인천지역의 치안을 빙자한 무력적 탄압을 위해 설치된 인천경찰서가 있던 곳.

- 인천경찰서는 인천감리서 안에 있었던 인천경찰서와 일본 측의 영사관 경찰서가 1910년 국권강탈로 합쳐진 것이다. 영사관 경찰서는 1882년 일본거류민의 보호를 위해 설치됐다. 당시에는 경부 1명과 순사 약간명이 있었다.

이후 1905년 을사늑약 체결 및 통감부가 설치됨에 따라 이사청 경찰로 개청했다.

1907년 경시청 소속에서 1910년 경무총감부의 관할로 있었으나, 1919년부터는 경기도 경찰부에 소속되었다.

1910년의 인천경찰서 관할은 인천부내 15개면이며 순사주재소 6개소, 순사파출소가 6개소이다. 이는 수원경찰서의 21개면 관할에 순사주재소 10곳, 순사파출소 1곳과 비교할 때 인천지역의 치안을 빙자한 무력적 억압의 큰 관심이 집중된 지역임을 알 수 있다.

한국의 근대적 치안제도는 1894년에 경무청의 설치로부터 시작된다. 통감부 설치 이후 1907년 경무청은 경시청으로 개칭되고, 경무서는 경찰서로, 파출소는 순사주재소로 개칭됐다. 경술국치 2개월 전인 1910년 6월24일 '한국의 경찰사무위탁에 관한 각서'에 의해 일제가 경찰권을 장악하게 되면서 한국의 치안 업무는 통감부가 '통감부경찰서관제(統監府警察署官制)'를 통해 경무총감부(警務摠監部)를 정점으로 운영됐다. 주차군 헌병대장이 경무총장을 겸임하는 헌병경찰제도가 시작됐다.

일본영사관 구내에 있던 일본 인천경찰서는 1932년 중구 송학동에 벽돌로 2층 건물(560여㎡)을 신축해 이전했다. 광복 후 이 건물은 인천경찰서, 중부경찰서 등으로 사용하다가 1978년에 헐었다. 현재 이곳은 사라지고 옹진군 선거관리위원회가 들어서 있다.


▲옛 동공원 터

1890년 인천에 설치된 일본인 신사이자 공원

- 인천에 진출한 일본인들은 1890년 자신들의 조상을 모시는 신궁과 신사를 조성하고 이를 인천공원이라 불렀다. 이후 1914년 각국 거류지의 철폐와 함께 공원관리권이 인천부로 이관되면서 만국공원은 서공원으로, 인천공원은 동공원으로 불렸다.

신사가 있어 인근 동네를 궁정이라고 불렸고,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의 거주지로 번창했다.

청산호혜(靑山好惠)의 '인천사정'에는 공원 중앙에 천조황대신궁을 안치해 봄과 가을 두 번 제사를 지낸다는 내용이 있다. 또 '정자가 두 곳에 있는데 각기 수명루와 명월루로 불렸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어 '청아한 정자와 맛나는 술, 아름다운 여자들과 눈부신 전경으로 인해 빼어난 풍경을 지니고 있어 산광수색제일루(山廣水色第一樓)라 하였으니 참으로 그럴듯 하다'라고 적혀 있다. 동공원은 당시 일본의 무력 침탈에 의해 세워진 공원이자 신사로, 서구 열강의 각국 조계에 의해 이름 붙여진 만국공원과 함께 민족의 아픔과 애환이 잘담겨 있다. 현재 이 곳은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가 조성돼 있다.

/이주영 기자 leejy96@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