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명호 평택대 상담대학원 교수


대한민국이 여러 가지 주제로 갈등을 겪고 있다. 제사를 둘러싼 가족의 갈등, 성을 둘러싼 갈등, 갑질과 을질의 갈등, 노측과 사측의 갈등, 교사와 학생·학부모의 갈등, 통일에 대한 갈등, 남북 단일팀에 대한 갈등, 세대 간의 갈등, 한·중 및 한·일 간의 갈등 등이 그 몇 가지이다. 이것 외에도 무수한 많은 갈등들이 존재한다.
어쩌면 갈등이라는 표현이 적합한지에 대한 갈등이 일어날 수도 있겠다. 적폐를 바로잡는 것이라거나, 정당한 의견 표명을 하고 있는 것이지 갈등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다.

여기서 갈등이란 과거에는 당연하다고 생각한 어떤 일에 대해 서로 다른 의견들이 발생하고, 이해충돌이 일어나며 집단적 대립이 생겼는데도 자기가 옳다고 믿는데서 생기는 경우로 국한하고자 한다.
이러한 갈등의 근원에는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이 있어서 가능하다. 그것은 탈중심화 혹은 해체주의 틀이다. 하나의 중심적 진리만이 진정한 진리이고, 나머지는 진리의 아류 정도로 해석된 사회에서 다양한 진리가 동시에 존재하는 것으로 바라보는 관점으로 전환되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국가만이 삶의 핵심이기에 국가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대통령은 그 국가의 상징이고, 따라서 대통령이 명령하는 것은 모든 것이 정당할 것이라고 간주한 것이다. 길거리를 걷다가 국기하강식의 애국가가 들려오면 길거리 한복판에서도 소리가 나는 쪽으로 경례를 했다. 선생님의 그림자는 밟으면 안 되고, 부모님께는 효도해야 한다. 명절에는 고향에 가야지 해외여행을 가는 것은 불효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기존의 중심화 사고나 가치로 세상을 바라보면 너무 쉽게 상처를 입는다. 사회가 당연한 것처럼 부여해온 사회적 가치와 역할을 자기 것으로 인정하고 살아온 사람들은 상처를 입게 된다. 회사를 위해 헌신을 다하며 살아왔다고 생각하는데, 무엇하려고 그렇게 열심히 살았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당황스럽다. 남자의 역할과 여자의 역할이 구분된다고 생각하고 살아왔는데, 그것은 말도 안 된다는 반응을 들으면 혼란스럽다. 기존의 가치가 아니라 자신이 무시당하는 느낌이 든다.

더욱 충격을 느끼는 사람들은 나름대로 개방된 사고를 가지고 약자 편에 서 왔고, 사회정의를 바로 세우고자 노력했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스스로 어디에 편향되어 있지 않고, 민주시민의 보편적 상식으로 살아왔다고 믿는다. 그러나 자신의 믿음 이상으로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불편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다. 자신이 소중하게 여겨온 것을 무너뜨리는 사람들, 무엇 하나 자기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사회, 자신의 의도와는 다르게 해석되는 말 등으로 마음을 다칠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사회에서 물러나 가만히 있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과거에 중요하게 생각했던 삶의 가치와 기준을 새롭게 정의할 것을 요구받는다. 이러한 재 정의에 실패하는 경우 우리는 심리적 상처를 입게 된다. 그렇다면 나는 전부 틀렸으니 새로운 기준과 가치를 받아들여야 하는가. 아니다.
탈중심화시대에 사람과 사회가 진정 자유롭게 되는 수단은 있는가. 있다면 무엇인가. 그것은 사람들 간에 공명을 일으키려는 노력이다. 즉, 서로 동시에 심리적인 가치의 울림이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서로의 울림이 서로를 향해 울릴 때는 통합의 가능성이 사라진다. 서로 다른 떨림이 서로에게 전달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우리가 서로에게 영향 끼치며 살아간다는 것, 서로에게 공감하고자 노력해야 한다는 것, 서로의 독자성을 존중하는 것이 병행되어야 한다.

우리의 우선순위는 갈등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갈등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갈등이 해체를 통해 더 큰 자유로 탄생해야 한다. 해체한다는 것은 진정한 자유를 주는 것이지, 새로운 형태의 억압과 구속이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우리는 진실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여 타인들과 소통하고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

자기의 말을 마음에 담아두는 것이 미덕인 사회가 아니다. 과거 사회는 중심사회였기에 권위자가 알아주면 문제가 해소되는 사회였다. 이제는 자신의 마음을 개방하고, 타인들과 공명이 생기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도 있는 그대로의 '나'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