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주년] 5. 인천수탈 탄압기구 - 상. 일본은행
[3·1운동 100주년] 5. 인천수탈 탄압기구 - 상. 일본은행
  • 인천일보
  • 승인 2019.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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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수탈로 나라 황폐화 … 중심엔 일본은행 있었다
▲ 옛 일본 제1은행 인천지점 (現 인천개항박물관-인천시 유형문화재 7호).

▲ 1902년 일본은 대한제국의 허가 없이 제1은행권 지폐를 발행했다.

▲ 옛 일본58은행인천지점(現 인천시 요식업조합-인천시 유형문화재 19호).

▲ 옛 일본18은행 인천지점 (現 인천 개항장 근대건축전시관-인천시 유형문화재 50호).

안중근 의사 거사 도모 이유
7번째'제1은행권 지폐 강제 사용케 한 죄'

일제 일본은행 앞세워 경제수탈
화폐개혁·토지몰수·미곡탈취 등

일본 제1·18·58은행 인천에 세워져
현재 유형문화재로 … 박물관 등 이용

1은행 韓 금융장악·日 영사관 금고
한국·조선은행 인천지점으로 사용

18은행 나가사키 상인들 편의 목적

58은행 인천전환국 주조 화폐 교환



1909년 10월26일 오전 9시30분. 중국 하얼빈(哈爾濱)역에서 안중근 의사가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가슴, 옆구리, 복부에 총알 3발을 쐈다. 그리고, 안 의사는 '코레아 우라!'(대한국 만세!)를 세 번 외쳤다.

안 의사는 하얼빈 거사 후 하얼빈 일본총영사관에서 일본 관동도독부 검찰관 미조부치타카오(溝淵孝雄)의 신문에서 이토를 저격한 15개의 이유를 밝혔다. 이중 7번째가 '제1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이다.


19세기 말, 한반도는 열강 앞에 풍전등화였다.

1876년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면서 일제의 식민지화는 노골적으로 진행됐고, 경제수탈로 나라는 황폐화됐다.
화폐개혁, 토지몰수, 토지 담보 대출, 미곡 탈취 등 일제는 경제 수탈을 위해 일제 은행을 진출시켰다.

인천에는 일본 제1은행 인천지점, 일본 제18은행 인천지점, 일본 제58은행 인천지점이 세워졌다. 이외에도 여러 개의 은행건물이 있었지만 모두 없어지고 이들만 남아 있다.

일제는 늘어나는 자국 상인 편의와 수출입에 필요한 자금 운용을 내세웠지만 속셈은 경제수탈이다. 인천에 들어선 일본은행이 숫자로 불리게 된 것은 1872년 일본의 국립은행 조례에 의해서다.

이 조례에 따라 인가된 허가번호를 숫자로 부여했다. 국립은행은 말뿐, 국가의 통제를 받아 민간업자가 설립한 은행이다. 과거 1~153번까지 있었고, 현재까지 존속되는 은행도 상당하다.

1902년 일본은 대한제국의 허가 없이 제1은행권 지폐를 발행했다. 대한제국에서 발행됐지만 일본화폐와 교환 가능한 이 지폐 전면 우측에는 일본 제1은행장 시부사와 에이이치가 새겨졌다. 대한제국이 나서 제1은행권 사용과 유통을 막으려 애썼지만 일제의 온갖 방해로 어려움을 겪었다. 안 의사의 이토 처단 7번째 죄악이 바로 이것이다.

옛 한국은행 설립 직전, 일본은 본격적인 대한제국 병탄 과정에서 발생될 사회 내부의 반감을 고려한 듯 1908년부터 다음 해에 걸쳐 기존의 지폐양식을 탈피한 새로운 제1은행권을 발행했다. 옛 한국은행은 1911년 한일병탄 후 조선은행으로 바뀌었다.

2015년 '식민지 조선 지폐양식에서 국가적 상징의 주변화'을 쓴 김판수 인천대학교 HK 연구교수에 따르면 "한국의 근대화폐사에서 전통 화폐단위였던 '양(兩)-전(錢)-푼(文)'체계가 공식적으로 사라지고 오늘날 한국에서 사용되고 있는 근대적 화폐 단위인 일본 화폐단위인 원(圓: 일본의 円)으로 변화된 것은 1900년대 초반부터 전개된 일본의 식민화 전략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김 연구교수는 또 "일본은 대한제국을 자국 중심의 화폐금융 체계로 통합하려 했기에 화폐단위 통합은 필수적이었다"고 덧붙였다.


▲옛 일본 제1은행 인천지점

1883년 인천 제물포 개항과 함께 한국 금융계 장악을 위해 일제가 설립한 은행.

- 일본 제1은행 인천지점은 일본 도쿄의 제1은행을 본점으로 1888년 개설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인천 제물포가 개항한 1883년 업무를 개시했고 당시 조선 유일의 해관은행으로 자리했다.

그러나 이는 일본이 한국의 금융계를 장악하기 위해 설립한 것으로, 일본은 1894년 청일전쟁 승리 후 식민지 지배를 위한 공격적이고 무자비한 경제적 세력으로 성장한 상태였다.

이 건물은 1897년 일본인 니이노에 다카마사(新家孝正)가 모래·자갈·석회를 제외한 모든 건축 재료를 일본에서 직접 가져와 만들었다.

판석재 외장 마감으로 아치 현관이 중앙에 있고 좌우대칭의 비례를 갖는 르네상스풍의 건물이다.

건립 당시 지붕 용마루에 바로크 장식의 천장이 있었으나 현재는 없고, 지붕 용마루 부분과 돔은 동판에 기와 지붕이었으나 지금은 함석으로 개조되어 있다. 건물 출입구 상단에는 '조선은행(朝鮮銀行)'이란 한자가 남아 있다.

일본제1은행은 처음에는 조선에서 생산된 금과 사금을 매입했다가 이후 일본영사관의 금고 역할을 했다. 개항장에서 해관(세관)이 관세와 수수료를 징수하고, 대한제국 정부에는 어음을 줬다.

이후 규모가 점차 커져 한양에 출장소도 개설했다. 1909년 한국은행이 설립되면서 한국은행 인천지점으로 바뀌었고, 1911년 한국은행이 조선은행으로 바뀌면서 조선은행 인천지점이 됐다.

해방 후 한국은행 인천지점과 인천지방법원 등기소 등으로 사용 후 2006년 인천 중구가 매입해 현재 인천개항박물관으로 활용 중이다. 인천시 유형문화재 7호.

▲옛 일본 제18은행 인천지점
일제가 한국 금융 지배를 위해 설립한 일본 나가사키 18은행의 인천지점.

- 1890년대 인천에 살고있는 일본인의 약 절반은 야마구치(山口), 나가사키(長崎) 사람들이었다.

나가사키에 근거지를 두고 설립된 제18은행은 나가사키 출신 상인들이 상해에서 수입한 영국 면직물을 한국시장에 다시 수출하는 중개무역으로 큰 이익을 거두자 1890년 10월에 인천지점을 개설했다.

당시 7개의 은행을 비롯해 13곳의 보험사의 소유자가 천일은행을 제외하고는 모두 일본인 소유였다는 것은 일본은행 모두가 한국 금융계를 일본 식민지화 하려는 목적이었다.

건물은 전반적으로 절충주의 양식을 취하고 있으며 단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벽돌과 콘크리트 등을 쌓아 건설한 조적조 구조위에 시멘트와 모래를 물로 반죽한 모르타르 마감을 했고 기둥과 기단 부위는 돌로 채웠다.

출입구의 석주장식은 아주 정교하게 시공됐고 모임지붕 형태로 목조 트러스트 위에 일식기와를 얹었다.

일본 제18은행으로서의 업무가 언제까지 계속되었는지는 기록이 없다. 1936년 조선식산은행 인천지점, 1954년에 상공은행과 신탁은행이 합병해 발족한 한국흥업은행 지점으로 사용됐고, 1992년까지 카페로 쓰이다가 현재 인천개항장 근대건축전시관으로 꾸며졌다.

일본 제1은행과 제58은행 인천지점이 금고를 본관 외부에 설치한 것과 달리 이 은행의 금고는 내부에 마련했다. 인천시 유형문화재 50호.

▲옛 일본58은행 인천지점

1892년 일본이 경제적 수탈을 목적으로 설립한 오사카 제58은행의 인천지점.

- 일본 제58은행은 대외 상거래가 가장 활발한 오사카(大阪)에 본점을 두었던 은행으로 1892년 7월 개점했다.
제58은행은 인천전환국에서 주조되는 신 화폐와 구 화폐의 교환업무를 보다가 후에 제130은행과 제3은행 등 군소 은행과 합병해 야스다(安田)은행으로 개편됐다.

이후 1942년 발족한 조흥은행이 1946년 4월1일에 인천지점을 그대로 사용하다가 1958년 7월 신사옥으로 이전하면서 은행건물의 기능은 마감하게 됐다.

건물은 2층으로 되어 있으며 1층은 석조기단으로, 2층은 발코니와 위쪽이 둥근 도모창으로 되어 있다. 지붕은 2층으로 경사를 이루는 맨사드 지붕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전반적으로 절충주의 양식을 취하고 있다.

외부는 조적조 2층에 석편마감으로 되어 있다. 1층은 화장실과 홀만 있고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연결되어 있다. 현재 이 건물은 인천시 요식업조합이 쓰고 있다. 인천시 유형문화재 19호.

/이주영 기자 leejy96@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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