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복 터진개문화마당황금가지 대표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사람은 오랜 기간 침묵을 배운다. 뭐, 그렇게 믿고 있다. 누군가의 임종을 지켜보면서 공통으로 느낀 점은 누워있는 분들 대부분 말씀을 안 하신다는 거다. 그것도 그렇게 믿으려 한다. 영화 속 최후의 장면처럼 비장함이나 극적인 모습을 상상해낼 수 없을 만큼 절박한 순간이기에, 한 마디 말씀을 기적인양 기다리는 이들에게도 침묵은 언어가 된다. 그렇지만 그 기다림의 순간은 엄청난 언어의 폭발이 유보돼 있다. 이도 역시 믿고 싶다. 대성통곡은 침묵의 또 다른 결이다. 말은 부재하고 오로지 게송처럼 큰 신음을 반복적으로 토해내기 때문이다. 요점은 침묵과 비탄은 한 옷을 뒤집어 입은 같은 언어라는 점이다. 제 아무리 빼어난 미사여구도, 달관할 것 같은 미소도, 단말마 같은 외마디도 결국은 같은 범주에 속해 있다. 이도 역시 그러리란 추측이다.

인천에 평생 살면서 소소했지만 지극히 개인적 경험이었고 다른 삶도 있음을 알려주던 창구였는데, 뜻하지 않은 사고로 비명횡사한 '절친'이 불현듯 생각났다. 절친이란 표현이 무색할 정도로 격의가 없었고 세상 밖으로 나와서는 안 될 말도 자연스럽게 나누기도 했던 사이였다. 뭐, 이 정도면 이해하기에 따라 다르지만 믿거나 말거나한 친구가 틀림없다. 일단, 침묵해야만 할 약속들은 5년 넘게 잘 지키고 있고 여태까지 절친에게 누가 될만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 걸 보면 적어도 의리는 지켜지고 있는 셈이다. 거명하면 엔간히 다 알아낼 수 있는 분이라서 이름을 밝히지 않지만, 혹시라도 '세상 밖으로 나와서는 안 될' 말들에 관심이 있다면 그래도 묻지 말아달라는 부탁을 정중히 드리고 싶다.

새해 들어 인천한담을 무겁게 끌고 가는 이유는, 요즘 개항장 일대 문화지구와 관련해서 '29'라는 숫자가 이슈가 되고 있어서다. 얼마 전엔 역사자료관과 제물포구락부가 입길에 올라 게스트하우스와 카페로 바꾼다는 시정부 어느 중책이 입방아를 찧어댄 게 떠오른다. 독자들이 피부로 잘 느끼지 못할 부분이라 다시 중언부언하는 이유는 29라는 숫자가 상징하는 의미가 제법 무겁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인천역과 차이나타운, 올림포스호텔 일대는 인천 근대 개항역사의 산실로 알려진 개항문화지구이다.

문화지구는 역사문화자원의 관리·보호와 문화환경 조성을 위해 필요한 지구로서 특별시장·광역시장 또는 도지사가 '문화예술진흥법'과 '국토의 계획 및 이용에 관한 법률'에 따라 조례에 의해 지정·고시한 지구를 말한다. 이렇듯 문화지구는 시민의 문화적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문화 환경 조성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뜬금없이 29층 899실 규모의 오피스빌딩이 인천역 옆으로 말뚝 박듯 들어선다는 소식이다. 뭔가 아귀가 안 맞고 있다. 소홀히 다뤘던 역사를 살리고 시민의 삶에 풍부한 문화소양을 시정부 차원에서 수유한다 해놓고 버젓이 벌이는 딴 짓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인허가 문제점에 하자가 없다는 중구청이나 원도심 재생에 각별한 의지가 있다는 시정부의 행태에 의구심이 든다. 사유재산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없지만 기왕의 문화지구이고 개항 역사의 현장에 좀 더 계획적이고 세심한 행정의 손길을 뻗지 못했는가라는 한탄이 체증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1883년 인천개항 이후 이 지점은 한국사는 물론이고 인천 근대역사의 생생한 현장이다. 개항장 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일일이 말을 늘어놓지 않아도 어느 정도 알려진 장소다. 여하간 진위를 따질 것 없이 액면 그대로 조감도처럼 펼쳐보니 구린내 나는 구석이 감지된다. 물증이고 심증이고를 떠나 몇 몇 사람들이 자신의 이윤을 위해 획책했다는 게 그려졌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윤집단처럼 돈을 좇던 불나방들이 남들보다 더 많은 정보를 획득하는 위치에서 조직적이고도 자본을 맹신하는 신도가 되어 벌인 작태라는 지적도 있다.

누군가 연루되어 허무맹랑하게 일을 벌여놨는지 명약관화지만 차마 필설로 드러낸다는 게 작가적 소심함과 소시민적 삶에 누가 될 것 같아 마음을 다독이고 있다.
나의 절친 이 옹이 어눌하고 쇳소리 나는 목소리로 비밀의 빗장 운운했을 때, 침묵 아니 망각의 축복을 바라기까지 했었다. 사람이라면 이 정도의 양심과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는 게 지론이 돼버렸다. 이런 차원에서 29층짜리 눈엣가시 정도는 '모르쇠'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거슬리는 건, 인천 시민을 문화적으로 품격 있는 환경을 독려해 숙성시켜도 모자랄 시점에서 일부 사회 지도층이 자신의 배를 불리겠다고 야합한 정보를 끼리끼리 나눠먹었음을 뇌까려보니 헛구역질을 멈출 수 없다. 인천에서 벌어진 일이다. 그래서 인천이다. 그래도 인천이길 바라건대, 침묵에도 품격이 있고 배불리는 데에도 품격이 있다는 것을 진정 배울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