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가면 언제 오나~"
전국 팔도 '마지막 길'은 그의 노랫소리로 보내리
▲ 서종열 장인이 북장단에 맞춰 상여소리를 선창하고 있다.

 

▲ 서종열 장인이 꽃상여를 이고 가는 모습. /사진제공=광주문화원

 

▲ 장지까지 운구할때 쓰이는 요령.
▲ 장인의 편지
▲ 장인의 편지

 

8살때부터 논일하며 '곡'하다
귀동냥으로 노랫말 달달 외워
광주 제일가는 선소리꾼으로
"변질된 장례법은 안타까워"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오실 날이나 알려 주오"
누구나 피해 갈 수 없는 인생의 마지막 관문, '죽음', 우리 선조들은 예로부터 이 죽음을 대할 때 영원한 이별에서 오는 슬픔을 망자의 명복과 남은 자들의 행복을 기원하는 노랫소리로 승화했다. 한국 전통 상례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상여소리'가 그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불과 30년 전만 해도 매장 형태로 지내던 장례 문화는 시대 흐름에 따라 화장 문화로 바뀌면서 상여소리를 내던 상여꾼들은 점차 설자리를 잃게 됐다. 머지않아 기록으로만 남게 될 이 시대, '진정한 상여 소리꾼'을 광주에서 찾았다. 세 번째 발견 서종열 장인을 소개한다.

▲망자의 영혼과 산자의 마음을 위로하는 일

장례 의식 가운데 하나인 '상여소리'는 만가, 상두소리 또는 향두가, 회심가, 옥설개, 설소리 등 지역마다 부르는 이름도 제각각이다.
이는 장사를 지낼 때 상여를 메고 가는 상여꾼 혹은 상두꾼·향도꾼이 부르던 노래를 의미하며 주로 망자에 혼을 달래 극락왕생을 염원하고 대대손손 조상의 은덕이 이어지길 바라는 노랫말로 불려진다.

상여소리는 노동요와도 성격을 같이한다. 적게는 4명에서 많게는 28명의 상여꾼들이 장지까지 상여를 메고 가야 하는 고단함을 잊기 위해 상여소리를 불렀다. 절차는 선두에서 선소리꾼이 선창을 메기면 나머지 상여꾼들은 선소리꾼이 흔드는 요령(운구할 때 쓰이는 종)에 맞춰 뒷소리를 받게 된다.

이때 선소리꾼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목소리가 좋아 소리를 잘하면서도 아는 노랫말이 많아 끊김 없이 앞소리를 메기며 현장을 주도해야 하기 때문에 선소리꾼의 자질은 곧 장례식 전체 분위기를 결정지었다. 경기 광주에서 선소리꾼 하면 단번에 서종열 장인을 꼽는다.

1939년 광주시 초월읍 지월리에서 태어나 80년이 다 되도록 이 마을을 지켜 온 광주의 터줏대감, 서종열 장인은 상주들의 눈물을 쏙 빼 놓는 게 주특기였다. 서 장인 특유의 구성진 가락과 구슬픈 소리, 즉흥적으로 메기는 노랫말들은 유족들의 공감을 얻기에 충분했다.

"광주 선소리꾼 하면 나 서종열이를 제일로 쳐줬어. 내가 구구절절 내뱉은 말들을 듣고 있자니 다 맞는 말이라 이거야. 전국 팔도 안 불려 다닌 곳이 없어."
서 장인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여든이 된 나이에도 광주는 물론 전국 각지에서 요청이 쏟아졌다.

"요샌 상여 안 쓰면 안 쓰는 대로 장지까지 가는 영구차나 장례식장에서 선소리를 메겨. 나는 선소리할 때 공이 흩어지지 않게 하려고 술도 안 마시고 정성을 다하니깐 지금까지 찾아주는 거지. 이 나이 먹고도 찾아주니 얼마나 고마운지."

▲망자에게 고하는 아름다운 이별

30년도 훌쩍 넘긴 세월 동안 선소리꾼으로 살아온 그의 노래는 8살 때부터 시작됐다. 나무를 하러 가거나 논일을 하며 습관 삼아 내던 곡소리가 지금의 선소리 장인을 만들었다. 농사일을 하며 지내오던 그는 30살 들어서 우연히 불가(佛歌)에 상여 소리 한 구절을 접한 것을 계기로 행상소리, 자진상여소리, 달구소리를 통달하게 됐다. 문맹이었던 그는 귀동냥으로 적은 몇몇의 노랫말을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시도 때도 없이 틈만 나면 외워댔다.

"나보고 다 미쳤다 그랬어. 하루 종일 중얼거리니 그럴 수밖에. 일자무식 까막눈이 뭘 알겠어. 그저 외우는 수밖에 없지."

면의 소사 일을 맡아 오다 1983년 광주시 공설묘지 관리원으로 일하게 된 서 장인은 이를 계기로 장의사와 염사 업무를 본격적으로 배우게 됐고 정년퇴임한 1999년까지도 남다른 성실함과 근면함으로 이 지역 알아주는 묘지기였다. 퇴임 후에도 그의 선소리는 그칠 줄 몰랐다. 동네의 장사(葬事)에는 빠짐없이 불려 다녔고 광주 제일가는 선소리꾼으로 유명세를 치렀다.

"천덕꾼인지라 아버지한테 아버지라고도 못 불러 봤어. 지금이야 날 추켜 세워주지만 예전엔 천하디 천한 족보 없는 상놈이라고 서러웠지. 날 아직까지 불러주는 건 내 처신은 저만치 낮추고 신분이야 어떻든 고개를 조아리며 공을 다하는 게 비결이라면 비결이지."

최근까지도 선소리꾼으로서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서 장인은 급격한 시대 변화에 따라 점차 변질돼 가는 우리 장례법에 대한 안타까움도 드러냈다.
"원칙대로 해야지. 상조 회사에서 와 가지고 넉자씩 넉줄 있는 발인문을 겨우 책을 보고 읊어. 얼마 되지도 않는 글자, 뜻을 이해하고 성심을 다해야지. 그게 망자를 대하는 자세고."

이토록 장인 정신으로 점철된 그는 2002년 당시 광주문화원 연합회와 함께 경기도 무형문화재 지정을 위한 시도를 해왔다. 안타깝게도 등재에는 실패했다. 사라져 가는 선소리꾼들 사이에서 어쩌면 그의 목소리를 들을 날도 머지않았다는 생각에 더욱 안타까운 결과였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그거 안 해도 나 알아주는 사람 있으면 된 거고 아직까지 불러주는 사람 있으면 된 거지."
슬하에 2남 2녀를 둔 서 장인이 살면서 겪은 가장 큰 보람은 어려운 형편에도 두 아들 모두 대학을 보내고 이제는 공직자가 된 자식들이 성실히 살아가는 모습을 볼 때였다.

"큰 아들놈은 땅을 팔아가지고 대학까지 보냈어. 다 말렸는데도 내가 초등학교도 못 나온 게 한이 돼서 자식 놈은 공부를 끝까지 시키려 했지. 애들은 내가 아픈데 없이 건강하게 지내서 좋고 나도 애들이 건강해서 좋고 우린 서로 잘 만났어."

/글·사진 박혜림 기자 hama@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