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민 수원화성박물관장

 

아시안컵 축구대회가 열리고 있는 요즘 밤잠을 설치고 있다. 베트남은 8강 진출에 따른 박항서 감독의 매직에 열광하고 있다. 그 뜨거움은 이웃 나라 캄보디아, 라오스 등에게도 전파되고 있다. 이들 나라들을 통칭해 '인도차이나' 반도라 일컫는다. 프랑스가 지배하고 있을 당시 베트남을 배경으로 한 영화 <인도차이나>가 1992년 상영돼 호평을 받은 바 있다. 이래저래 인도차이나라는 명칭은 일상적 용어로 쓰이고 있다.

인도와 중국 사이에 있다고 '인도차이나'라는 용어를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사용하고 있다. 제국주의 시대 유럽의 그들이 무책임하게 부르던 이름일 뿐이다. 1880년대 베트남과 인접한 라오스, 캄보디아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연방'으로 만든 뒤부터 널리 쓰이게 된 용어가 인도차이나이다. 만약 우리나라가 일본과 중국 사이에 있는 반도라는 의미에서 '저팬차이나' 반도라고 불린다면 격렬한 항의를 받을 것임에 틀림없다.
'동남아시아'라는 용어도 그렇다. 우리쪽에서 보면 그들은 동남쪽이 아니라 서남쪽에 있다. 중동과 동남아시아와 극동아시아 등의 용어도 유럽 사람들의 눈에서 본 방위를 중심으로 한 용어일 뿐이다. 서양세력이 먼저 이룩한 지리적 성취로 방위 개념이 들어간 어색한 지명은 점차 바꿔 나가야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인도차이나라는 용어 대신 메콩강이 흐르는 땅이라는 의미에서 '메콩반도'로 쓰거나, 말레이반도까지 아울러 '황금반도'라 쓰는 것이 합당하다고 여기고 있다.

<논어>에서 공자는 정치를 맡기면 무엇부터 하겠느냐는 질문에 먼저 "이름을 바로잡겠다(正名)"고 하였다. 무릇 모든 사물 및 현상을 올바르게 이름 지어 부르는 것이야말로 중요한 일이다. 이러한 점에서 '서울외곽 순환도로'가 아니라 '수도권 순환도로'가 올바른 이름이라는 주장도 동일선상에 있다. 서울의 처지에서 보면 서울 바깥에 건설된 순환도로가 되는 것이지만 도로가 통과하는 경기도와 인천의 처지에서 보면 '수도권 순환도로'가 합리적인 명명인 것이다. 더욱이 서울을 통과하지도 않으면서 굳이 '서울 외곽도로'라 이름붙인 것은 서울 중심적 사고다. 경기도와 인천의 처지에서 이름을 붙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것이 정명(正名)인 까닭이다.

수원 동쪽에는 멀리 흘러간다는 뜻을 지닌 '먼내(머내)'라는 지방 하천이 있다. 먼내(머내)는 한자말로 '원천(遠川)'으로 쓰였다. 사람들은 먼내, 원천, 원천천, 원천리천 등 제각각으로 부른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원천리 옆을 흐른 하천이라는 이름의 '원천리천'으로 쓰인 이후 현재까지 원천리천이 법적 명칭이다. 생뚱맞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원천'이거나 '먼내'라는 제대로 된 이름으로 바꿔야 할 일이다.
1920년대 수원천의 범람으로 남수문과 매향교를 파괴하였다. 매향교와 북수문인 화홍문 사이에 '삼일교'가 신축되었다. 이는 김세환을 비롯한 교사들과 삼일학교 학생들의 성금으로 만든 뜻깊은 다리였다. 그러나 일제는 삼일교라는 이름을 매향교 북쪽에 있는 다리라는 의미의 '북매교'로 하였고, 현재는 뜬끔없는 '매향1교'로 되어 있다. '삼일교'로 제대로 명명해야 할 일이다.
학교 졸업식 풍경 가운데 '○○○ 외(外)' 몇 명 졸업생을 일컫는다. 그럼에도 호명된 사람 외에 익명으로 처리된 자들의 슬픔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호명되지 못한 나머지들은 흑싸리 껍데기로 대우받는 셈이다. 그럼에도 시비 걸지 못하는 현실이다. 이 불합리를 일제강점기 이래 지금껏 감수하고 있으니 슬프고도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 조상들은 보다 합리적이었다. 화성의 4대문 성돌에는 우리의 오랜 전통인 잘 보여주는 유물이 남아 있다. 축성 책임자들의 이름을 성돌에 큼직하게 새겨 놓은 것이다. 남문(팔달문)의 경우 공사 책임자로 문관 관료(김낙순, 이방운)와 기술자들을 직접 지휘한 무관들(이도문, 한상희, 임준창, 신숙)의 이름과 석수 김상득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팔달문을 쌓는데 가장 중요한 돌을 다루는 석공들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였다. 따라서 석축 공사를 담당한 사람들은 '석수 김상득 등 85명'으로 나온다. 김상득과 같은 석수 85명의 노고를 담고 있다. 공사에 참여한 석수는 모두 80명이다. 만약 지금의 방식대로라면 '석수 김상득 외 79명'으로 적었을 것이다. '누구 외 0명'과, '누구 등 0명' 어느 것이 합리적이고 옳은 표현방식인가? 우리 조상들은 누구누구를 호명하든 모두 같다는 의미의 '등(等)'을 붙임으로써 간단히 해결하였다.

평등한 세상은 누가 만들어주지 않는다. 끊임없는 싸움의 길이다. 근로자와 노동자, 글로벌스탠다드, 노동유연화 등 모든 용어를 우리는 올바로 쓰고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