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저널리스트


목수 가풍국(사진)은 '대한민국 목재창호 명장'과 '미추홀 명장'이라는 타이틀이 함께 따라다닌다. '명장'이란 칭호가 주어지기 훨씬 전에도 이미 해당 분야에서 최고였다. 이란 팔레비 국왕의 별장을 지었을 만큼 목재를 다루는 솜씨가 '월클(월드 클래스급)'이었다. 인천시 중구 항동에 있는 인천우체국(현 인천중동우체국)의 200짝이나 되는 오르내리창도 가 명장의 손에 의해 복원됐다.

'뒷방 노인네 소리' 들을 만한 일흔 셋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톱밥 쌓인 작업대와 연탄난로, 여기저기 쟁여놓은 목재들과 연장들, 미세한 나무 가루가 폴폴 날리는 부평구 십정동의 열악한 작업실에서 여전히 그는 나무와 씨름한다. 가 명장의 손은 나무를 자르고 다듬어 내는 그 오랜 세월을 그대로 담아낸 듯 굵고 거칠다. 그야말로 장인의 손이다. 그는 초등학교가 최종 학력이다. 19세 때부터 현장에서 허드렛일을 거쳐 대패와 톱을 잡는 목수가 돼 60년 외길을 걷고 있다.

나이테를 상감 기법으로 박아 넣은 '원목 나이테 상감문(門)'은 대표작이다. 예술성과 실용성을 고루 갖췄다는 평을 받는다. 불현듯 인천남동공단의 한 중소기업 사진 취재를 진행했을 때의 광경이 떠오른다. 제품 개발과 마케팅 담당 직원은 젊은 한국인들이었지만 생산 현장의 근로자들은 대부분 이주민 노동자들이었다.
장인은 현장에서부터 배우고 성장한다. 누군가는 가풍국 명장의 길을 이어받아 가야한다. 그 길을 통해 우리 사회가 오랜 시간 축적해온 전통성과 역사성을 내재한 가치를 다음 세대에게 전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우리 젊은이들은 사라지고 외국인 노동자들만 있다면 앞으로 우리나라 전통 가옥은 이주민 노동자들의 손으로 지어야할지도 모른다. 물론 '명장'의 타이틀도 그들의 것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