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든 장사든, 나는 '잘' 하고 싶다
▲ 국중범(민주당·성남4) 도의원은 "어느 자리에서 무슨일을 하든 잘하자, 잘 해내자" 라는 말을 항상 깊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김철빈 기자 narodo@incheonilbo.com

오전엔 현장돌고 오후 민원상담
나태해지지 않도록 계속 채찍질
상인 출신… 소상공인 정책 집중


"무엇을 하든지 어느 자리에 있든지 잘 하자, 잘 해내자."

국중범(민주당·성남4) 경기도의원은 21일 인천일보와 인터뷰에서 이같이 밝히며 "나태해진 모습이 보이면 언제든 호되게 질책해 달라"도 빼놓지 않았다.

지난해 6·13 지방선거에서 도의원에 당선된 이후 많은 사람들을 만나 의견을 듣고 공부하고 있다. 그 누구보다 성남시청 앞 경기도의회 성남상담소를 많이 이용한다. 새벽 6시에 일어나 현장 중심의 오전 일정을 빠르게 소화하고, 오후에는 상담소에서 민원인 상담과 사무 일을 처리한다.

사실 그의 꿈은 상인이었다. 돈을 많이 벌겠다는 것보다는 먹고 살겠다는 의지가 컸다. 어릴 적 아버지 사업의 부도로 집안이 굉장히 어려웠다. 중학교에 들어가선 신문배달을 하며 학교를 다녀야만 했다.

"부모님과 두 남동생, 저, 5명이 한 방에서 지냈던 기억이 나네요. 학교가 끝나면 곧바로 신문보급소로 달려가 신문 다발을 겨드랑이에 빼곡히 끼고 희망대공원 뒤편 신흥동 골목골목을 헤집고 다녔죠. 그때마다 장사하시던 분들이 그렇게 부러웠습니다. 과일가게를 보면 어린 마음에 과일을 많이 먹을 수 있을 거 같았거든요. 그래서 상인이 되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어요."

그의 꿈은 고등학생때 전환점을 맞았다. 당시에 5·18광주민주화운동 영상을 접하게 됐다. 1987년 6월 항쟁을 앞두고 '고등학생들도 현 시국에 적극 나서야 한다'는 신념으로 몇몇 고등학교 학생들과 가칭 '민주교육추진성남시고등학생연합회'를 결성하기도 했다. 유인물과 대자보를 만들어 학교에 뿌린 후 곧바로 경찰에 연행됐고 퇴학 위기까지 맞았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 영상을 보고 '내가 세상을 전혀 모르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됐습니다. 제게는 너무 큰 충격이었죠. 경찰 조사 후 학교로 돌아왔지만 퇴학은 정해진 분위기였습니다. 당시 주민교회 이해학 목사님과 장건 장로님이 많이 도와주셔서 퇴학에서 무기정학으로, 무기정학에서 유기정학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래도 경찰의 감시와 관리감독은 지속됐어요."

성인이 된 후 백창우 시인이 대표로 있는 포크그룹 '노래마을'에서 문화예술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레코드사는 다 부도가 났습니다. 가수, 연주자, 스튜디오사용료 등 제작비용을 모두 현찰로 지불하고, 유통은 어음으로 처리하던 시절이었습니다. 4집 앨범을 내고 활동하다 1999년도에 결국 해산을 하게 됐으니 오래 버틴거죠."

전화위복일까? 중원구 은행시장 바로 밑에서 장사를 시작했다. 어릴 적 그의 꿈이 이루어진 것이다. 건강식품 전문점을 운영하면서 아주 잘됐다. 그의 아내도 기뻐했다.

장사를 하면서 개혁국민정당 중원구지구당 위원장을 맡으며 정치에 입문했다. 2002년 또다시 새로운 길이 열린 셈이다.

"당시 유시민 전 장관이 100분토론 사회를 그만두고 '바리케이드를 치고 화염병을 던지는 심정'으로 노무현 일병 구하기를 선언한 모습을 봤어요. 아는 분들이 개혁국민정당에 있어서 그들의 권유로 동참했죠. 개혁당은 민주당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중원구만 하더라도 100여명이 자발적으로 월 1만원 이상의 당비를 내고 적극 참여할 정도였습니다."

2004년 총선에서 개혁당 출신 김태년 의원이 수정구에서 이상락 전 의원이 중원구에서 승리했다. 이상락 의원의 비서관으로 정치실무에 발을 내디뎠다. 그 뒤 김태년 국회의원실로 자리를 옮겨 활동했다.

"김태년 의원이 2008년 낙선을 한 뒤 원외지역위원장을 4년 동안 사무국장으로 일했습니다. 2012년 재선에 성공한 날 바로 사표를 내고 그만 뒀죠. 10년 했으면 됐다 싶었어요. 이제는 정치와 무관한 삶을 살고 싶었던 때였습니다."

성남시에서 최초로 공공갈등조정관을 공모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마음을 바꿔 공모에 참여해 공공갈등조정관으로 활동하게 됐다. 소상공인 파트였다.

하지만 대퇴골두무혈성괴사라는 병을 앓게 되면서 3년 반 만에 그만두고 수술을 해야만 했다. 현재는 괜찮아졌지만, 당시에는 다리를 절고 고통이 심해 약을 복용하고도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을 정도였다. 재활치료를 마칠 쯤, 경기도당 위원장의 권유로 경기도당 대외협력국장을 했고 이어 홍보미디어국장을 맡았다. 경기도 선대본부 공보팀장으로 대선을 성공리에 치러내기도 했다.

"16년 동안 네 분의 국회의원(이상락, 유시민, 김태년, 전해철)과 한 분의 시장(이재명)을 모시며 입법, 행정을 두루두루 거쳤습니다. 그런데 대의기관에 직접 들어가 민의를 정책에 녹아내는 일은 또다른 세상이었습니다. 생각보다 일이 많고 도의원들이 열심히 일한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도의회 안전행정위원회 소속으로 재난, 화재 등으로부터 도민의 안전을 어떻게 하면 잘 지킬 수 있을지 고민하며 6개월을 뛰어다녔다. 지난해 행정사무감사도 충실하게 준비했다. 도의회 민주당 대변인도 맡았다.

그는 전반기에는 도민의 안전을 중심으로, 하반기에는 소상공인을 위한 정책에 집중할 계획이다. 상인 출신으로, 성남시상인연합회 활동도 했다. 이 땅에서 어렵게 생활하는 상인들을 위해 이와 관련된 일을 계속해서 하고 싶다는 포부다.

"성남시는 재건축과 재개발, 도시재생사업, 취업 등과의 종합적인 연계를 통해 자영업자 비율을 낮춰나가는 전반적인 구조개혁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성남뿐만 아니라 도내 상인들이 제대로 활동할 수 있게끔 확인하고 또 확인해서 상인의 삶이 더 나아지도록 하고 싶어요."

국 의원의 바람은 간단하다. 그의 좌우명인 '잘'처럼 정치인이면 정치인, 상인이면 상인이라는 자리에서 '잘' 활동하고자 한다.

"상인의 아들이었고, 저 또한 상인이었고, 정치를 그만두면 상인으로 돌아갈 사람입니다. 도민들이 맡겨준 소임을 열심히 하고 이 소임이 다 하면 상인으로 돌아가 어렸을 때의 꿈을 다시 한 번 실현해 보고 싶습니다."

/최남춘 기자 baikal@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