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베어 물다 … 짤막하고 묵직하게

▲ 이기인 지음창비88쪽, 9000원

인천 출신인 이기인 시인의 세 번째 시집. 평소 소외된 사람들의 비극적 삶을 특유의 시각과 기법으로 그려내며 호평 받아온 이 시인이 <어깨 위로 떨어지는 편지>(창비 2010) 이후 9년 만에 펴내는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이전의 시세계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색다른 화법을 구사하며 단순한 변모를 뛰어넘는 시적 진화의 경지를 선보인다.

시인의 이번 시집에는 한두 문장으로 이루어진 짧은 시는 물론, 스무행을 넘지 않는 시가 태반이다. 그만큼 최소한의 정제된 언어로 삶의 장면과 시적 대상의 내면을 세밀하게 묘사하는 데 힘을 쏟았다.

"수저를 떨어뜨렸나"('까마귀'), "천국으로/ 김칫국물이 떨어졌다"('점심'), "누가 한뿌리씩/ 전생의 빛을 뽑아간다"('파')같은 단 한 문장의 시에서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흙을 만지는 시간') 하나의 사물 또는 일상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매가 얼마나 깊고 매서운지 가늠해볼 수 있다.

이기인 시의 독자라면 이번 시집을 여는 순간 당혹스러울 수도 있겠다. 기존의 언어 체계나 실감 또는 경험 논리로는 단어 하나하나에 촘촘히 새겨넣은 의미를 알아채기가 녹록지 않아졌기 때문이다. 시인은 상투적 정서에서 벗어나 낯선 시각으로 세상을 달리 보고자 한다.

"발버둥 팔다리를 축축하게 담그는 포도당 용액"('밑그림 반항'), "흰 수건에서 헤엄쳐 나오는 오리 한마리"('그렇다면 혼자') 같은 감각적이고 시각적인 이미지를 통해 사물의 뒷면에 숨어 있는 진실을 밝혀내려는 시인은, 시는 경험한 것이나 보이는 것만을 규명하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현실과 동떨어져 관념의 바다를 유영하는 것은 아니다. 시인은 "아무도 말도 없는 곳에서 당신을 찾아내"('이루어지도록')듯 시를 통해 끊임없이 세상과 소통하고자 한다.

시인은 1967년 인천에서 태어나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성균관대 국문과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2000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알쏭달쏭 소녀백과사전>, <어깨 위로 떨어지는 편지> 등이 있다.

/여승철 기자 yeopo99@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