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의 삶 갉아먹는 황충족
민옹전서 양반들 빗대 비판

 

▲ '후원놀이' 신윤복 그림. 연암 당대 황충족(蝗蟲族)의 삶을 엿 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간송미술관 소장

연암 박지원(1737~1805)

저 물 건너 400년 전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은 알아도 200년 전 조선 최고 문호인 '연암의 9전(傳)'을 아는 자는 얼마나 될까? 참 우리 것에 대해 야박한 민심이다.

각설하고, 연암의 9전 중, '종로를 메운 게 모조리 황충(蝗蟲)일세!'라 꾸짖는 <민옹전>으로 들어간다. 황충은 메뚜기과 곤충으로 벼를 갉아먹는 해충이다.

"이것들은 조그만 버러지니 조금도 걱정할 것 없어. 내가 보니 종로거리를 메운 게 모조리 황충이더군. 키는 모두가 7척 남짓이고 머리는 검고 눈은 반짝이는데 입은 커서 주먹이 들락거리지. 선웃음 치면서 떼로 다니는데 발꿈치가 서로 닿고 엉덩이를 이어서는 얼마 되지 않은 곡식을 모조리 축내니, 이따위 무리들과 같은 건 없을 게야. 내가 이것들을 몽땅 잡아버리고 싶은데, 거 커다란 바가지가 없는 게 한이라네."

관에서 백성들을 다그쳐 '황충을 잡아라'한다는 말을 듣고 민옹이 소리친 말이다. 민옹은 논이 아니라 종로거리에 키가 7척 남짓인 황충이 많다며 커다란 바가지가 없는 게 한이라고 한다. 이 <민옹전>은 연암 선생이 21세 되던 1757년(영조 33) 무렵에 지은 한문소설이다. 이 작품의 등장인물은 여러 명이지만 주로 나와 민옹이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연암은 <민옹전>을 쓴 이유에서 민옹이 황충이라 부르는 사람은 '게으른 사람'들이라 했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끝날 문제가 아니다. 성종 7년(1476년)의 흥미로운 기록을 보면 당태종이 이 '황충'을 날로 먹는다. 당시에 왕가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기위해 '훌륭한 임금', '처음에는 훌륭했지만 나중에 나빠진 군주', 그리고 '훌륭한 왕비'를 주제로 시를 짓고 글을 써서 병풍 3개를 만들었다고 한다.

당태종(唐太宗)이야기는 그 중, 첫 번째 병풍에 기록되어있다. 안시성 싸움에서 눈 하나를 잃은 당태종과는 상반된 모습이다. 당시 당태종은 나라의 기틀을 놓은 훌륭한 군주였고 그가 지었다는 <정관정요>라는 책은 정치학 교재처럼 읽혔다.

그런 그를 칭송하는 대목에서 언급한 것이 바로 이 황충이다. 당태종은 이 메뚜기 떼가 들이닥치자 "백성은 곡식을 생명으로 하는데, 네가 곡식을 파먹으니 차라리 나의 폐장을 파먹어라" 외치며 황충을 씹어 삼켰다고 한다.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 말이다. 너희들이 탐관오리가 되면 내 이렇게 씹어 먹겠다는 서슬 퍼런 경고였다.

황충은 풀무치, 혹은 누리라고도 하는데, '황충이 간 데는 가을도 봄'이라는 속담도 있다. 이 떼가 지나가면 농작물이 크게 해를 입어 가을이 봄같이 궁하다는 뜻이다. 사전에는 '좋지 못한 사람은 가는 데마다 나쁜 영향을 끼친다'로 풀어놓았다. 증산교 창시자인 강증산(姜甑山, 1871~1909)이 썼다는 <중화경>에서는 아예 '국가가 망할 징조'이다.

백성들이 낸 세금으로 일신의 안녕을 영위하는 이들, '메뚜기들은 조그만 벌레에 지나지 않으며 진짜 황충은 종로거리에 있다'는 민옹의 말을 새겨 들어야한다.

나: 민옹의 이야기를 이끄는 인물이다.

민옹: 남양 무인출신으로 첨사라는 벼슬을 지냈으나 영달하지 못하고 시골에 묻혀 울울하게 살아가는 이다. 은어와 기담을 자유롭게 구사하는 등 능갈치는 솜씨와 사날이 여간 아니어서 내 집에 머무르는 사람들이 문답을 하여 하나도 이겨내지 못한다.

민옹의 아내: 늙은 남편의 출세를 기다리다 지친 아낙이다.

악공들: 음악을 연주하느라 힘줄 세운 얼굴을 두고 민옹에게 성을 내고 있다고 당한다.

좌객들: 모두 민옹의 뛰어난 재주를 빛내는 조연 역할을 충실하게 하는 이들이다.
(배경: 1756~1757년, 서울.)

 

 

 

 

 

 

 

/휴헌(休軒) 간호윤(簡鎬允·문학박사)은 인하대학교와 서울교육대학교에서 강의하며 고전을 읽고 글을 쓰는 고전독작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