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일보=온라인뉴스팀01]

SBS 대표 시사고발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싶다'가 사회 전반의 다양한 문제점들을 찾아 집중 취재 재조명해 시청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가운데 희대의 사기범 장영자와 관련한 의혹을 파헤쳤다.

12일 방송된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는 '돌아온 큰 손 장영자, 500억 지하자금의 진실'이란 부제로 29년의 옥살이에도 여전히 베일 속에 감춰져 있는 장영자 사건을 추적했다.

돌아온 큰 손 장영자는 또 다른 사기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그는 단군 이래 최대 금융 사기 사건으로 불리는 지난 1982년 7111억 원대의 어음 사기 사건의 피의자.

장영자는 당시 막강한 기업들을 도산시키고 고위공직자와 은행장들도 감옥으로 보낸 정도의 엄청난 사건을 벌인 바 있다.

현재 6억 원대 사기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74세의 여인 장영자 씨. 그는 과거 '단군 이래 최대 금융 사기 사건'으로 불리는 1982년 7111억 원대 어음 사기 사건의 피의자다. 막강한 재벌기업을 도산시키고, 수많은 고위공직자, 은행장들을 감옥으로 보낼 정도로 세상을 뒤흔들었던 희대의 사기범인 장영자 씨는 이번이 네 번째 구속으로 수형생활만 29년에 이른다.

'목포에서 그 집안 땅을 안 밟으면 못 지나간다'라고 할 정도로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알려진 장영자 씨는 전두환 대통령의 친인척이자, 전 중앙정보부 간부 출신 남편이라는 배경을 등에 업고 미모와 재력을 두루 갖춘 '사교계의 여왕' 같은 존재였다고 한다.

장영자 씨는 1억 2천만 원짜리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고, 2명의 비서와 4명의 경호원이 곁을 지켰으며, 평균 직장인 월급이 20만 원이던 시절 한 달 생활비로 3억 9천만 원을 쓸 정도로 호화로운 생활을 했다고 전해진다.

장영자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친인척이자 과거 미모와 재력을 갖춘 사교계의 여왕이었다. 또한 남편 이철희는 중앙정보부 간부 출신이었다. 장영자는 한 달 생활비만 3억 9천만 원에 달하는 초호화 생활을 누린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장영자는 희대의 어음 사기를 벌인 당시 "결코 사기를 한 적이 없다. 구속되는 바람에 부도가 나고 피해 기업도 생긴 것이다"라며 당당한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전두환 전 대통령이 자신을 곧 꺼내 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법정은 장영자와 그의 남편에 대해 15년 형을 선고했다. 그리고 장영자는 출소 2년도 되지 않는 1994년 또다시 어음부도 사기로 구속됐다.

그 후 장영자는 2001년에 또다시 사기 혐의로 구속됐다. 구권 화폐를 신권으로 바꿔주면 30~50%의 웃돈을 주겠다며 200억 원이 넘는 돈을 받아냈다. 그리고 구속 전 장영자는 "IMF가 왜 왔겠나. 돈을 축적하고 부당한 방법으로 창고에 쌓아두는 것이 문제다. 생명을 걸고 구권의 실체를 밝힐 것이다"라고 인터뷰에서 자신의 혐의를 부인했다.

그리고 제작진은 이철희의 생전 인터뷰 영상을 입수했다. 영상 속 이철희는 아내 장영자 옥바라지로 꽤 지쳐 보였다.

이철희는 "무슨 말이 듣고 싶은 거냐"라며 "그 사람에게는 말이 필요 없다. 아픈 가슴을 뭐로 위로도 할 수 없을 만큼 아플 거다. 그래서 그냥 안아주는 거다"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세금 관계도 있지만 이제 마무리할 일들이 많을 거다. 지금은 돈이 다 묶여있기 때문에 내가 고생을 하고 있는 거지, 그게 풀리면 떳떳하게 할 수 있는 거다"라며 공작금 500억에 대해 언급했다.

이에 제작진은 500억에 대한 진실을 추적했다. 제작진은 예금증서의 발행인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은행 직원을 통해 장영자가 방문한 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됐다. 은행 관계자는 "한 지점에 예금으로 해서는 거의 절대치이기 때문에 500억 예금 증서는 사실상 있을 수 없다"라고 설명했다. 또한 그는 "한 달에 두 세 분씩 찾아온다. 이 종이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확인을 해달라고 온다. 경찰서나 검찰에서도 오고 일반인이 증서를 가지고 오기도 한다"라고 말해 눈길을 끌었다.

예금 증서에 대해 전문가는 "이는 원본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라며 복사를 통해 선이 뭉개진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또 다른 전문가도 "잉크젯 프린터로 위조를 한 것으로 추정이 된다"라고 했다. 그리고 이는 2008년 예금증서 위조 사건이 위조 예금증서와 동일했다.

최근 부산에서는 위조 수표가 포착되었다. 그리고 이 수표는 장영자의 이름으로 발행된 위조 수표였다. 하지만 장영자는 "죽은 남편이 남긴 유품이다. 유효한 수표인지 확인을 해달라고 건넸을 뿐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수사 과정을 통해 장영자가 수표 위조의 주범임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또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7천억 원대의 자산을 소유했다던 장영자. 그의 재산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제작진은 가장 먼저 제주도를 찾았다.

장영자가 소유했다는 토지 주변의 주민은 "땅을 매입할 때 이후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라고 증언했다. 또한 한 목장의 관계자는 "그 땅이 경매로 넘어갔다. 10년도 못 갖고 있었다"라고 말했다. 여의도 면적의 3배에 달하는 목장 부지를 사두고 방치하다시피 하다가 사건 발생 후 명의가 넘어갔다는 것.

제작진의 취재 결과 현재 장영자가 소유한 토지는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이에 전문가는 "어음사기사건으로 조달된 현금으로 누가 실명으로 재산을 소유하겠나. 차명으로 부동산을 소유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라고 분석했다. 또한 등기부 등본에서 일반적이지 않은 점들을 발견하며 장영자가 차명으로 재산을 현재에도 소유하고 있을 가능성에 대해 말했다.

또한 한 전문가는 "장영자의 취미 생활을 눈여겨봐야 한다. 장영자는 골동품 사랑이 대단했는데, 골동품은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재산이다. 부피 대비 가치가 많이 나가는 것이고 보관이 쉽고, 은행에 들어가지 않아 기록이 남지 않는다"라고 분석했다.

장영자는 오랜 시간 머물렀던 한 호텔에서 숙박비를 지불하지 않고 사라졌다. 이에 호텔 측은 소송에서 승소를 했지만 장영자로부터 숙박비를 받지 못했다. 이에 호텔 측은 그가 머물렀던 객실의 골동품을 매입하게 된다. 하지만 객실에 가득했다는 골동품은 단 37점이 남아 있었고 측정가는 7500만 원이었다.

장영자의 은닉 재산이 있는지 차명 재산이 존재하는지 확인하는 것은 힘들다. 1600여 점이 있다는 골동품의 행방도 의문이다. 하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500억짜리 예금증서는 위조임에 분명하다.

전문가들은 "장영자에게 특별한 것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라며 "사기 사건은 모르면 당한다. 당신한테만 기회를 준다, 재력이 있다는 사람들을 소개하는 이가 있으면 반드시 조심해야 한다"라고 조언했다.

장영자는 네 번째 사기 혐의에 대해서도 자신은 무고하다고 일관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제작진측은 "고액체납자인 그에게 재산이 남아있다면 끝까지 추징해야 할 것"이라 강조했다.

제작진측은 이어 "우리의 사법은 현재 징역 같은 신체적 처벌 외에 부정한 재산을 추징하는 것은 미흡하다. 제2 제3의 장영자가 나오지 않기 위해서도 반드시 제도적인 보안이 필요하다"면서 "그것이 어쩌면 그가 보내는 역설적인 메시지일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용산 참사의 괴물을 만들어낸 것은 누구일까?

19일 방송된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는 용산 참사에 대해 조명했다.

당시 진압을 위해 출동했던 김남훈 경사는 죽음을 맞았고, 망루에 올랐던 용산 세입자 이충연 씨는 아버지 이상림 씨를 잃었다.

당시 망루에는 원인을 알 수 없는 폭발음이 들렸고, 이에 이충연 씨는 살기 위해 창문 밖으로 몸을 던졌다.

그리고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아버지를 잃고 '살인자'라는 이야기와 '공권력의 피해자'라는 이야기를 함께 들었다.

10년 전 용산 4구역, 세입자들이 농성 중이던 남일당 건물 옥상에서 전 국민을 충격에 빠트린 참사가 발생했다. 5명의 세입자와 1명의 경찰특공대원이 사망했다.

당시 경찰의 과잉진압이라는 논란이 일었으나 법원은 적법한 집행이었다며 경찰의 손을 들어줬고 그렇게 용산 참사는 마무리됐다.

그리고 지난 1월 14일 민갑룡 경찰청장이 용산 참사의 희생자 유가족에게 사과할 예정이라고 밝히며 용산 참사에 대해 다시금 돌아보게 되었다.

당시 소속 의경은 "사람이 떨어지는데 에어매트 위로 못 떨어지고 팔이 꺾이는 상황이었다"라며 "위에서 시키니까 명령이 떨어졌으니까. 위에서 명령이 떨어졌으면 들어갔을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명령을 했다는 특공대장의 말을 달랐다. 그는 "지휘를 한 적이 없다"라며 진입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고 밝혔다.

제작진은 당시 용산 경찰서장을 만났다. 그러나 그는 제작진을 향해 화부터 낼뿐이었다. 또한 그는 인터폰 너머로 화가 가득한 말들을 내뱉었다.

당시 현장에서 지휘를 맡았던 총책임자는 "내가 세세한 것까지 지휘한 것은 아니다. 현장에서 보고만 받았을 뿐 명령은 없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제작진의 질문에 10년 전에 이미 답했다며 대답을 회피했다.

그리고 당시 서울 경찰청장이었던 현 국회의원 김석기는 "경찰의 법 칩행은 정당했다고 본다"라며 당시 상황이 극복 가능한 수준으로 판단했다고 밝혔다.

이에 김남훈 경사의 아버지는 "우리 아들은 죽었지만 그 뒤에 들어간 사람들도 다 화상을 입고 나오고 그랬다"라며 "더 큰 사고가 났으면 어쩔 뻔했냐. 그런 판단도 못하고 경찰 옷을 입고 있으면 어쩌냐?"라며 제대로 된 상황 파악을 못했던 당시 당국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을 털어놓았다.

한 제보자는 "용역들이 계단으로 올라가는 것을 눈으로 볼 수 있을 상황이었다. 확실한 건 그 건물을 용역들이 자유자재로 올라갈 수 있었다"라며 "일반인들의 출입을 제대로 제지하지 않았다"라고 증언했다.

그리고 당시 철거업체 직원은 당시 영상을 보며 "저희 직원이 맞다. 주제넘게 농성을 막아 보겠다고 개입한 것이 잘못이다"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경찰들이나 소방관이 폭력이라고 하면 안 된다고 했으면 우리가 했겠냐"라며 "우리는 소방관 협조까지 얻어가면서 시민들을 향해 물을 쏜 것인데 우리 죄로 몰아갔다"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2009년 7월 경찰청은 용산참사 때와 유사한 진압 훈련을 하기도 했다. 또한 최근 경찰청 내부 문건이 공개되며 이 훈련이 "경찰의 공권력은 정당했고, 시위자들이 위험한 사람들이라는 경찰의 정당성을 홍보하기 위해 2차적인 문제가 발생했다"라는 점이 밝혀지게 됐다.

당시 망루에 올랐던 한 시민은 "딸이 매일매일 아빠 언제 오냐고 물었단다. 그런데 돌아오는 시일이 멀어지고 시간이 걸리니까 딸은 어느 순간 정신과 치료도 받고 그랬다 더라"라고 말해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또한 망루에 올랐던 이충연 씨는 망루에 올랐다는 이유만으로 공무집행 방해로 징역에 처했다. 그는 "가슴에 수인 번호를 다는 것도 인정할 수가 없었다. 왜냐면 내가 아버지를 죽였다는 이야기밖에 안 되는 거였다. 내가 누구를 다치게 하려고 망루에 올라갈 이유는 없었다"라고 말했다.

망루로 올라간 용산 4구역의 주민들은 말도 안 되는 이사 비용을 내밀며 폭력을 행사하며 세입자들을 내모는 것을 막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던 일이라고 말했다.

이충연 씨는 "폭력으로부터 보호받고 싶어서였다. 망루에 올라가서 문을 잠그고 있으면 그래도 그들이 때릴 수는 없잖냐. 용역들의 폭행에 맞서기 위해서 생각한 것이 망루였다"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당시 용산 구청장은 "그들은 세입자가 아니다. 떼쟁이다. 개발하는 데마다 돈 내라고 이런다. 그 사람들이 시위를 해서 사고가 났다"라고 말하며 그들을 비하하기도 했다.

당시 세입자들은 "이야기를 좀 들어달라고 했지만 들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망루에 올라갔지만 어떤 이야기도 들어주지 않고 몇 시간 만에 진압을 시작했다"라며 당시의 믿지 못할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하지만 법원은 "피고인들은 법률에 정한 절차에 집회나 시위 등을 통해 자신들의 주장을 알릴 수도 있었고 조합이 제기한 명도소송 절차에서 그 주장을 펼칠 수도 있었고, 입법의 미비를 이유로 헌법소원을 제기할 수도 있었고 입법 청원을 할 수도 있었다"라고 당시 세입자들의 죄로 몰아갔다.

이에 김형태 변호사는 "생각하면 아주 슬픈 재판이다. 21세기 대한민국이 겪은 지옥의 아주 정확한 단면을 보여준 사건이다"라며 씁쓸해했다.

박진 경찰청 인권침해사건 조사위원회 위원 "갈 곳이 없어서 망루로 올라갔는데 공권력이 투입돼서 참사에 이르게 만든 사건이다. 사건 이후에 이들은 또 다른 범죄자가 된 거다. 평범한 사람들을 괴물로 만들어냈던 과정 같다"라며 안타까워했다.

당시 세입자였던 이들은 용산 근처에서 집과 가게를 잃고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특히 다수의 세입자들은 실업자가 되거나 기초수급자가 되어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또한 김남훈 씨의 아버지는 "솔직한 마음으로 그분들도 안됐고 우리 아들도 안됐다. 당연히 공무원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야겠고 철거민은 자신의 주권으로 찾으려고 하다가 그렇게 희생이 된 거다"라며 비극적인 참사에 대해 떠올렸다.

지난해 경찰청 인권침해 사건 진상 위원회 조사에서는 용산 참사와 관련해 철거민과 가족, 순직한 경찰과 가족에게 사과할 것을 권고했다.

세입자들이 건물에서 밀려나는 건 이웃과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빼앗긴다는 의미다. 하지만 경찰이나 구청에서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 상황에서 망루에 올랐다.

영하의 날씨에서 물대포를 맞으며 망루를 세운 이들의 심정은 어땠을 까?

용산 참사 이후 10년, 도시정비법상 영업 손상 보상비를 3달에서 4달치로 늘린 것뿐이다.

현재 대한민국의 부동산 상위 1%가 전체의 46%를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내 건물이 없어 밀려나는 이들의 비극은 타인의 일 뿐만이 아닐 것이다.

2019년에도 여전히 터전을 잃고 밀려나는 이들의 비보를 들으며 우리는 10년 전 그들을 떠올린다. 망루에 올랐던 이들의 이야기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정유진 기자 online01@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