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백년 대장장이 자부심 "내 칼 쓰면 다른 칼 못 써요"
▲ 김영환 장인이 웃어보이고 있다.

 

▲ 좌전칼이 종류별로 놓여있다.

 

▲ 김영환 장인이 좌전칼의 단조과정을 하고 있다.


전국돌며 기술익혀 고안해 낸 좌전칼

벌겋게 달아오른 쇳덩이 두들겨 제작

생선 손질에 용이 … 40년 단골도 있어

후계자 없어서 사라질 위기 안타까워

여전한 노력 … 스테인리스 기술 터득


2000도가 넘는 화덕에서 꺼낸 벌겋게 달아오른 쇠덩이를 연신 두들겨대면 괭이든 무쇠 칼이든 못 만들어내는 것이 없다. 언제부터인가 대장간 문 밖으로 요란스럽게 들려오던 메질 소리는 다큐멘터리 방송 프로그램에서나 들을 수 있을까? 이마저도 이젠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문 닫는 대장간들과 점차 사라져 가는 대장장이들 사이에서 벌써 54년째. 전통 방식만을 고집하며 명맥을 이어온 '무쇠 칼의 달인'을 용인에서 찾았다. 두 번째 발견, 김영환 장인을 소개한다.

#쇠를 두드려 만드는 '좌전칼', 용인시 마지막 대장장이


무쇠 칼은 겉보기에 투박해 보이지만 단단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럽다. 내려치는 순간, 쇠뭉치도 가뿐하게 두 동강 내 버리는 게 무쇠 칼이다. 힘 좋다는 무쇠 칼이 인기를 끌자 전국 도처에 대장간에서는 앞 다투어 무쇠 칼을 만들어 내놓기 시작했다.

그중 용인 처인구 원삼면 좌항리에서 명칭을 따온 '좌전칼'은 우수한 절삭력과 100년 사용해도 부러지지 않는 기술력을 바탕으로 지금까지 여전한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좌전칼은 김영환 장인이 직접 고안해 낸 칼이다. 숙련된 기술 노하우를 기반으로 40여 년 전 전국 각지 내로라하던 대장간을 다니며 기술을 익힌 그가 고향이자 지금의 대장간 자리인 용인 원삼면 좌항리로 내려와 탄생하게 된 것이 바로 좌전칼이다.

"80년대 들어 통닭 붐이 일어났었죠. 시장을 가면 죄다 닭을 패고 있을 정도로 통닭의 인기가 대단했었습니다. 그때마다 대장장이인 제가 눈여겨본 것은 단연 칼이었는데 당시만 해도 가정용 칼로 닭을 손질하다 보니 부러지기 일쑤였고 그걸 본 이후 닭을 손질할 수 있는 튼튼한 칼을 만들어보자 했던 것이 지금의 좌전칼을 만들게 됐습니다."

좌전칼은 자동차 부품에 쓰이는 철을 주원료로 단조 기법(철을 달군 뒤 망치로 두드려 원하는 형태의 철제품을 만드는 과정)을 활용한 전통 방식을 통해 만들어진다. 특히 김영환 장인 특유의 열처리 공법은 칼의 우수성을 결정지었다.

단조 기법으로 만들어진 제품에서 열처리 과정은 절삭력과 칼날의 단단함을 좌우하며 좋은 칼을 만들어내는 결정적 요인이기 때문에 과정이 매우 까다롭다. 하지만 녹슬지 않는 스테인리스 칼의 등장과 산업화의 발달로 대량 생산이 가능해지면서 장인의 칼을 찾는 이들이 줄어갔다. 게다가 값싼 중국산 칼에 밀려 국산 수제 칼은 점차 설 자리를 잃게 됐다.

"중국 공장에서 만들어진 칼은 싸고 대량 생산이 가능하다는 이점이 있지만 사실 직접 손으로 두들겨 만든 칼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기술력에서 차이가 납니다. 열처리 깊이가 얕기 때문에 튼튼하지 못한 중국 칼은 수시로 부러지기 일쑤죠. 그래서 그런지 여전히 좌전칼을 사기 위해 이곳을 찾는 손님들이 있습니다."


#40년 '좌전칼' 단골

고수는 고수를 알아본다 했던가. 현재까지도 40년 동안 거래를 이어온 단골 상인들의 말은 한결같다.

'좌전칼 쓰다 다른 칼 못 쓰겠다'며 결국은 다시 좌전칼을 주문한다는 것. 특히 생선손질에 용이한 좌전칼은 수도권 일대 이름 난 어시장에 납품하며 변함없는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생선 자르는 칼로 2등 하라면 섭섭할 것 같네요. 어디 가서 김영환이 좌전칼 나쁘다는 소리 못 들어봤습니다."

김 장인이 이토록 자부심을 갖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16살 되던 해, 일찍이 어머니를 여읜 김 장인은 형편이 어려워진 탓에 어린 나이지만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쌀밥이 귀하던 시절,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동네 대장간의 제안에 따라 대장간 일에 처음 발을 들이게 됐다. 그의 남다른 손재주는 유명세를 달리해 여러 철공소와 대장간에서 영입 제안이 이어졌다. 전국에 내로라하는 대장간들을 오가며 기술을 단련하게 된 그였다.

그렇게 지내온 54년, 금수강산이 바뀌어도 5번이 바뀐 세월 동안 모든 것이 변했지만 그가 만든 좌전칼의 성능만큼은 여전했다. 하지만 그의 좌전칼을 볼 수 있는 날도 오래 남지 않았다. 올해로 일흔을 바라보는 김 장인이 예전처럼 작업을 해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술을 이어 갈 후계자가 없어 좌전칼은 사라질 위기에 놓였다.

"호황기를 누렸을 시절엔 수십 명의 대장장이들과 일을 해왔죠. 하루 기껏해야 200개 만들어 내는 대장간은 공장 생산에 당해 낼 재간이 없었죠. 우수한 칼이라도 찾는 사람들이 줄게 됐습니다. 대장간이 어려워지면서 대장장이들을 하나 둘 내보내게 됐고 기계를 직접 공수해 홀로 작업을 해 온 세월도 13년이나 흘렀습니다. 이마저도 배우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이 없죠. 배우겠다고 찾아온 이들을 도리어 돌려보낸 적도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안타깝습니다."

반백년 대장장이 인생, 김영환 장인은 예전만큼 작업을 하진 않지만 여전히 좋은 칼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해오고 있다.

"모든 일에 최고는 없다고 생각해요. 아직도 후배들을 찾아 이것저것 물어보며 배우고 익히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녹슬지 않으면서 단단함까지 갖춘 스테인리스 칼을 만드는 기술을 터득했습니다. 스테인리스 좌전칼을 오랜 단골들에게 먼저 선보일 계획입니다."

장인이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은 그에게 한결같이 고수해 온 장인 정신만큼 고집스러운 철칙이 있다. "좌전칼이 예전만 못하다는 얘기를 듣지 않도록 명성을 이어가는 것이죠. 좌전칼을 쓰는 손님들을 배신하는 일이 없도록 비록 힘이 들더라도 예전 방식 그대로 만들어 내는 것이 오랜 시간 좌전칼을 써 준 손님들에 대한 보답이라 생각합니다."

/글·사진 박혜림 기자 hama@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