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3월 '아벨서점'에서 열린 임명진 대사의 작품 전시회.


들어가는 글

인천 동구 배다리는 원도심의 상징같은 곳이다.

헌책방 거리로 알려져 있지만 배다리에는 1892년에 설립한 영화관광경영고등학교 등 오랜 시간 지켜온 역사와 문화가 숨쉬는 곳이다.

배다리를 스쳐간 많은 사람들이 간직하고 있는 '배다리 이야기'를 아벨서점을 45년간 지켜온 곽현숙 대표와 책방이자 문화공간인 '나비날다'의 권은숙 대표가 2주에 한번씩 들려준다.





1. 외교관에서 화가로 돌아온 임명진


2018년 스페이스 빔은 '인천 문화양조장'을 선포하면서 십년 넘게 배다리를 알리는 일을 넘어, 진정한 문화를 위해 애쓰고 있다.

민운기 선생의 열정을 보면서 지난해 문화기획가 권은숙씨가 어르신 인문강좌에 모셔서 말문을 열기 시작한 임명진 어른이 생각났다.

임 어른은 1953년 휴전 후, 주미대사 3급 서기관으로 임명받고 35년 공직 기간 중 20년을 해외에서 근무했고 베네수엘라, 덴마크 대사 등을 역임했다.

인천 최초의 치과인 임영균 원장과 인천양조장 최병두 초대 사장의 외동딸 최정순 님의 큰아들이다.

1928년 경동에서 태어났고, 세살 되던 해에 외가로 이사했다. 조부 임영환 어른은 관직에 있었고, 그 시대에 책방을 운영했다.

아버님과 작은 아버님 임근수 박사는 인천 역사에 기록될 만큼 열정적으로 살았다. 이는 책과 함께 살아온 조부님의 영향이 중심에 있었을 것이다.

임 대사는 조부님을 뵙지 못했지만, 책방에 오면 곧 책에 빠져들어 떠나기를 아쉬워했다.

그 모습에서 대를 이어 흐르는 책 속 새로움의 물길을 본다. 대사님과 양조장에서 있었던 일을 나누었다.

"일제 말엽 쌀 배급이 끊어져 마을 사람들이 힘들 때, 외조부님이 양조장에만 특별히 배급되는 쌀을 나누어 주셨어요."

"아주 좋은 일이었네요. 그러면 조봉암 선생님도 본 적이 있나요?"

"그럼! 가끔 뵐 때 친근하게 말을 걸어주셨어요. 외무부에 근무할 때도 기차에서 만나 말을 나눌 기회가 있었지요. 선거 때는 할아버님이 당신 사무실을 선거 사무실로 내주셨어요."

"처음 들어요!"

"한옥 그 옆집도 우리 집이었으니까요."

"역시 동성한의원 그 자리였군요! 책방 하던 자리에 선거사무실을 재현하려다가 못했어요."

"하! 그런 일도 있었군요." 어림잡던 현장이 실증으로 밝혀주니 기뻤다.

"경기중학을 졸업한 해에 중국 가기 전에 창영동에 살던 작은아버님 친구 이순복(인천중 영어 선생과 한양대 교수 역임) 선생이 해방 전에 귀국해 당장 기거할 곳이 없으니까 아버님이 치과 옆방을 내드렸는데, 나라 밖 정세와 학생들이 영어를 열심히 배워야 하는 이유를 말씀해 주셨지. 열심히 했어요. 일생에 잊을 수 없는 은인이죠."

그때 배운 짧은 영어로 일본군 포로로 잡혀온 호주 군인이 양조장 뒤 철로 보수공사를 할 때 대화하며 놀았다.

한국동란 중에는 인천중학교 영어교사로 있었는데, 길영희 인중·제고 교장은 일생을 두고 잊을 수 없는 큰 스승이었다고 회고한다.

외무부는 장관 비서실장이던 인천 출신 갈홍기 박사 추천으로 근무하게 됐다.

어느 날 책상 위에 자작 영시 한 편을 친구인 리퍼블릭 영자신문사 기자가 가져가 변영로 사장에게 주어 신문에 발표하게 됐다.

사장 형님인 변영태 외무부 장관이 이 기사를 보고는 불러 몇 마디 물어보고는 대견해했다.

그 후 석 달 만에 주미대사관에 3급 서기관으로 발령이 났다.

이에 외할아버님이 사흘 동안 동네잔치를 해주었고, 그때 찍은 기념사진은 아직 대사님 책상 위에 놓여 있다.

퇴직 후, 대사님은 1958년 프랑스 파리에서 시작한 미술에 다시 열중하게 되었고, 인천시립박물관 초대 관장 이경성 관장의 지도를 받았다.

평생 작품 400점 중 일부를 임명진이라는 그림도록을 만들었다.

아벨서점에서 주최한 '한 권의 책' 전시에 책에 담긴 작품과 실제 9점의 작품은 전시에 들어서는 이들의 감동으로 시집 같은 방명록을 만들었다.

대사님의 작품에 나타난 그림내용에 깃든 색감은 모든 인간의 상처 속에 돋는 지향성을 박수치는 배다리의 기운으로 보인다.

/아벨서점 곽현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