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의 마지막 삶, 기록하고 싶어"
▲ 전지 작가가 드로잉 작업을 하고 있다.

▲ 전지 작가가 모르타르 벽면을 채집한 채집 카드를 선보이고 있다.

▲ 전지 작가 채집운동 작품집에서 작품명:연극을 해도 좋을 뷰 2.

▲ 석수시장 블랙마켓에 참여 했던 전지 작가 모습.

▲ 전지 작가가 모르타르로 만든 조형물.

글은 누구나 쓸 수 있다. 그러나 누구나 쓸 수 없는 글쓰기가 있다. 이 시대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보통사람들'의 평범하지 않은 글에 우리는 주목했다. 낡은 것, 헌 것, 앞으로 사라질 것들에 관심 가지는 이들은 많지 않다. 도리어 새로운 것, 현대적인 것, 세련된 것을 쫓을 뿐. 그러나 여기 누군가 기록하지 않으면 사라졌을 것들에 주목한 이가 있다. 만화가이자 미술작가 '전지'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가끔 안양천으로 산책 나가면 나도 나왔듯이 사람들이 걷고 뛰고 자전거 타고 맥주를 마시거나 고기도 구워 먹는다. 나는 이런 자연스러운 풍경이 이따금씩 어색하게 느껴진다. 이곳은 내가 초등학교 때 늘상 다 마신 나의 우유팩을 가감 없이 버리는 곳이었으니깐. 안양천을 지나야 하는 친구 집에 갈 때면 우리는 장의사집이라도 지나 듯 유난스럽게도 코를 막으며 뛰어 지났는데 우리에게 이곳은 똥~천이었기 때문이다.'
<채집운동:똥천을 알고 있는 아저씨(박석교 아래)中에서>


#삶을 채집하는 작가

전지 작가는 유년 시절부터 26년간을 살아온 안양에서 현대 문명의 발전으로 사라질 위기에 놓인 것들에 관심을 가졌다. '곧 철거될 허름한 건물', '지금은 보기드문 모르타르 벽면의 주택 양식', '맞춤법에 맞지 않게 써 내려간 어마무시 한 경고장' 등 평범한 일상에서 지나쳐 버리기 쉬운 것들을 눈여겨 뒀다, 드로잉, 조형물, 만화 등 다양한 미술 방식으로 채집해 나갔다.

"언제부터인가 삶의 터전이었던 이곳 안양을 기록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됐죠. 저의 유년시절 추억이 묻어있는 이 일대가 재개발로 바뀌어가는 모습에 누군가는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미술가로서 어떤 것을 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에서 출발한 작업이 채집운동입니다."

전지 작가의 아카이브 작업 <채집운동>은 2017년 경기문화재단 시각예술 지원 사업에 선정되면서 옛 모습으로 기록될 안양 지역 곳곳을 탐방하며 즉석에서 드로잉 한 작품들을 책으로 엮어 출판한 작품집이다.
"안양이라면 어느 지역보다 잘 알고 있고 지루한 곳이라고 단정지었지만 탐방을 하면서 제일 많이 내뱉은 말은 '안양에 이런 곳이 있었어'라는 말이었습니다. 가장 먼저 없어질 것 같은 곳, 각 계절에 따라 인상적이었던 장소, 손글씨 경고장 등을 즉석에서 드로잉 작업하며 채집해 나갔습니다."

전지 작가는 드로잉 작업뿐 아니라 기억의 장소들을 조형물을 통해 소개하기도 했다. 마치 초등학교 미술시간에 빚은 점토 인형과 같이 측량에 의해 반듯하게 만들어진 조형이 아닌 투박하고 감정으로만 빚은 조형물을 통해 안양을 기록했다.

최근 전지 작가는 이제는 찾아보기 힘든 주택의 모르타르(몰타, 시멘트) 외벽에 관심을 갖고 채집 작업을 벌이고 있다. 모르타르(시멘트)는 8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주택의 담벼락을 세울 때 주로 등장하던 소재였다. 외벽마다 각기 새겨진 독특한 문양과 미장 작업자 특유의 상징적인 싸인이나 벽면이 마르기 전, 누군가 새겨 넣은 듯 한 글귀를 전지 작가는 주목했다.

"유명한 미장 작업자들은 한 동네를 통으로 작업 해오곤 했었죠. 그들 역시 한 명의 아티스트로 보고 그들이 새겨놓은 기교들은 때때로 그 동네의 이미지를 상기시키기도 합니다."
그는 지난해 11월 모르타르로 만든 채집 작업물들을 대중에 공개하는 전시회를 가졌다.
"방문하신 관람객 분 가운데 한분이 이런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천천히 걷게 됐다고 지나치기 쉬운 것들에 조금은 관심을 가지고 돌아보게 되더라면서요."

'한 달에 한 삼백 버냐? 아빠, 나 한 달에 삼십삼만원 벌어. 돈 못 버는 창작을 하고 있는 걸 이해해달라는 제안은 아니고 …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는 것, 그렇다고 내가 사업을 시작하는 참이어서 대박을 기다리거나, 대기업 정직원이 돼서 고속 승진하는 성공을 기다려달라는 것도 아니다. 기다림보다는 나를 좀 내버려둬 달라는 게 맞겠다. 내 밥벌이를 제대로 하고 싶은 마음은 내게도 있으니 … .' <끙 中에서>


#팔십 팔만원 세대 축에도 안 끼는 세대

단편만화 수필집 <끙>은 전지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가 담긴 첫 단편만화 수필집이다. 끙은 80년대생으로 태어나 여성 만화가로서 살아가는 전 작가의 삶에 비춰 이 시대 청년들의 고충과 애환을 만화로 담아냈다.
"청년들의 공감요소가 많을 것 같아요. 당시 제가 미술 작업을 하면서 버는 수입은 30만원에서 50만원 정도였고 88만원만 돼도 감지덕지겠다 생각했죠. 당시 상당한 입학금을 내고 4년 동안 공을 들여 미대를 졸업한 저의 삶을 이야기로 풀어냈습니다. 4년제 미대나온 작가 수준이 고작 요정도다 하면서요."

전지 작가의 '끙'은 작가 본인의 고달픈 삶을 전제로 끙끙 앓고 있는 청년세대들의 어두운 단면을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있다. 이 책이 자전적 이야기로 만들어진 사실을 알고 있는 독자들은 한결 같이 작가의 삶을 우려하고 걱정한다. 동시에 아직도 그가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궁금해한다. "젊은 날의 어두운 표상들을 그려낸 이 끙의 독자분들께서는 제가 잘 살고 있는지 우려들을 많이 해주고 계세요. 보다시피 저는 작품 활동을 하며 매우 잘 살아가고 있다고, 걱정 마시라고 전하고 싶습니다."

조끼를 입고 돌아다니다가 눈에 들어온 것들을 만들거나 그린다. 생활과 창작을 하면서 쌓인 이야기들은 수첩에 적어 놓았다가 만화책으로 만든다. 만들어진 책을 판매하기 위해 앞 내지에 간략한 글을 쓰고 포장을 하고 우체국으로 갈 때, 내가 '일 다운 작업'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쪼가 살아있는 한, 동력이 가동되는 한, 계속 그렇게 뭘 만들어낼 것 같다. <채집운동 中에서>
전지의 작가시점(http://www.facebook.com/viewpointofAo).

/박혜림 기자 hama@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