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있게 해준 '애국선열 숨결' 마주하다
▲ 애국지사 황장연 선생.
▲ 애국지사 황장연 선생.
▲ 백범 김구 선생.
▲ 백범 김구 선생.

 

인천 내동지역 감리서 터

명성황후 시해 日 중위 죽인
백범 김구 선생에 사형 선고
집행 전 감형 … 옥고 중 탈옥


강화 선원면 더리미

강화잠두교회 항일 준동지 지목
김동수 권사 3형제 압송중 살해


부평 '일본군 조평창'

日 무기 생산 … 병참 핵심지역
오순환, 무기 구하려 위장 입사
황장연, 임시 정부에 무기 인도
日에 붙잡혀 안타까운 징역형



인천 내동지역의 감리서 터는 백범 김구 선생이 수감생활을 하다 탈옥한 곳이며 김동수 등 3형제 순국지는 반일활동을 하던 김동수와 김남수, 김영구 3형제가 일본 현병에 의해 살해당한 강화 선원면 더리미 지역이다.

부평의 일본군 조병창은 일본의 중화학 기계산업의 전진기지로 소총과 탄악, 소구경 화포, 수류탄, 차량 등을 제작·생산을 담당했던 곳이다.

▲ 인천 감리서 터.백범 김구 선생이 수감 생활을 하다 탈옥한 곳 이다.
▲ 인천 감리서 터.백범 김구 선생이 수감 생활을 하다 탈옥한 곳 이다.

 

▲인천 감리서 터

'1896년 6월 백범 김구 선생이 황해도 안악 치하포에서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인에 대한 원수를 갚기 위해 일본인 중위 쓰치다(土田)를 살해한 혐의로 수감됐었다가 탈출한 곳'.

- 황해도 안악에서 벌어진 시해 사건을 왜 인천에서 재판 했을까. 인천과 김구의 연은 깊다. 그래서 인천은 김구를 잊으면 안된다.

감리서는 개항장의 사무를 관장하기 위해 설치했던 관아로, 1883년(고종 20)에 처음으로 인천·덕원·동래 등에 설치 후 1895년(고종 32)에 지방제도 개편으로 폐지됐다. 이후 1896년 감리서가 부활됐으나 을사늑약으로 인해 외교관이 박탈당해 감리서도 1906년(광무 10년) 10월 모두 폐지됐다.

김구는 1896년 2월 황해도 안악 치하포에서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인에 대한 원수를 갚기 위해 일본인 중위 쓰치다를 살해한 혐의로 그해 6월 체포되어 인천감리서에서 재판을 받게 됐다. 1896년 10월 교수형이 내려졌으나 광무황제 특사령 전보로 사형집행 직전에 감형되어 목숨을 구했다. 김구가 감리서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김구의 의거에 공감한 인천지역 인사 김주경 등은 청원을 7~8차례 올려 김구 구명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만 큰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김구는 인천 감리서에서 신서적을 접하며 변했다. '왜놈 한 놈이라도 때려 죽여야 우리가 산다'는 신념에서 '저마다 배우고 사람마다 가르치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것'으로 인식이 바뀌었다. 김구는 1898년 3월19일 같이 수감되어 있던 4명과 함께 탈옥했다.

중구 용동 마루턱~시흥방면 소로~벼리고개(부평에서 만수동 방향 고개)~부평~양화도~남대문~청파(동)를 거쳐 은신에 성공했다.

- 인천 감리서가 있던 내동지역은 개항장의 중심지로 인천항을 드나드는 선박을 조망할 수 있는 지리적 요지였다.

이 안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지방우체사인 인천우체사는 물론 법원과 검찰, 학교도 세워졌다.

현재 인천 감리서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대지는 여러 개의 필지로 나눠졌고, 유구는 흔적도 없다.

그나마 대지 전체의 모습은 거의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지만, 도시개발사업으로 사라질 위기다.

아파트 후미진 곳, 쓰레기와 잡초만 무성하고 두 개의 팻말만 이 곳이 항일의 성지임을 나타낼 뿐이다.

지방의회에서 수 차례 보존 필요성을 강조했지만, 집행부는 여전히 무관심이다. "사유지이다. 터마저 지정 문화재로 등록되지 않았다"는 궁색한 논리에 "김구의 수감지로 사형 직전 광무황제의 특사령의 전보에 의해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한 역사적 이야기가 풍부한 현장이다"며 "이러한 사항들을 포함한 내용의 비문 및 안내문을 설치하면 매우 효과적인 교육적 장소가 될 것으로 판단된다"는 의견이 더해졌다.

▲ 김동수 3형제 순국터. 강화 선원면 더리미 지역.
▲ 김동수 3형제 순국터. 강화 선원면 더리미 지역.

 

▲김동수 등 3형제 순국지

'1907년 반일활동을 하던 김동수와 김남수, 김영구 3형제가 일본 현병에 의해 살해당한 장소'.

- 1905년 3월3일 강화진위대장을 사임한 이동휘는 지방 전도사인 김우제를 통해 감리교에 입교하고 강화잠두교회에 나가게 됐다. 이동휘는 이후 1907년 군대가 해산 되자 7월24일 강화로 내려와 강화읍내 연무당에서 기독교인 김동수·감남수 형제, 허성경, 김광천, 김기약 등과 군중집회를 열고 격렬한 배일연설을 했다.

26일에는 같은 장소에서 대한자강회총회를 열고, 30일에는 전등사에서 김동수, 허성경 등 기독교도와 해산된 군인 400명을 모아 합성친목회라는 대규모 반일 집회를 열었다.

이후 8월9일 강화군민의 봉기가 일어나자 수원의 일본군은 11일 강화에 도착해 진압을 시작했다. 갑곶진 전투에서 50여명이 사살되는 등 우리쪽 피해가 속출하는 동안 일진회원들의 제보로 강화잠두교회가 반일운동의 준동지로 지목되어 일본군이 포위를 하고, 김동수 권사와 그의 동생 김영구, 사촌동생인 김남수 등 3형제를 압송하는 중 더리미에서 살해했다.

- 당시 정동교회 부목사였던 현순의 자사에 관한 사실과 강화지역 기독교인들이 세운 기념물을 통해 위치가 확인됐다.

선원면 더리미는 강화 갑곶에서 남쪽으로 약 1㎞ 떨어진 지역으로 강화외성이 있는 자리와 일치한다. 이 사건은 이들이 압송되던 중 일어난 사건으로 김포를 향해 가는 배가 들어오던 선착장 근처로 강화도 기독교인에 의해 순국비가 세워져 있다.

이에 "현장에 순국기념비 표지판이 있지만 좀더 널리 홍보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첨부된만큼 우리에게는 아직 낯설다. 하지만 기독교의 '피의 독립운동사'에는 어김없이 이들 3형제의 순국 의지가 나타난다.

▲ 일본군 조병창 부지 현재 모습.오순환·황장연 선생이 활동한 곳 이다.
▲ 일본군 조병창 부지 현재 모습.오순환·황장연 선생이 활동한 곳 이다.

 

▲일본군 조병창 의혈투쟁지
'1938년 3월 무기제작 기술을 습득코자 조병창에 입사한 오순환과 1944년 9월3일 조병창의 무기를 습득해 임시정부에 인도한 황장연이 활동한 곳'.

- 부평 조병창은 1939년 '조병창'이라는 일본육군의 병기창으로 시작됐다.

육군 조병창은 중화학 기계산업의 전진기지로 소총과 탄악, 소구경 화포, 수류탄, 차량 등을 제작·생산했다. 월간 소총 4000정, 총검 2만정, 탄환 70만발, 포탄 3만발, 군도 2000정, 차량 200대 등을 생산했고, 1944년부터는 잠수정을 생산했다.

이에 따라 인천 지역은 일본의 대륙 병참의 핵심 전진 기지로 바뀌었다.

오순환은 1938년 3월 조선총독 및 일제의 고관 앞잡이를 살해할 목적으로 동지를 규합한 후 표면상으로는 체육회를 조직해 회장이 됐다. 이후 오순환은 거사에 사용할 병기를 구하기 위해 인천조병창에 위장 입사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탐지한 일제 경찰에 체포돼 1944년 5월10일 경성지법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2년간 수형하게 됐다.

황장연은 1943년 3월5일 인천조병창에서 고려재건당을 조직하고 1944년 9월3일 권총 3정, 실탄 50발을 입수해 임시정부 연락원 신교선에게 인도했다가 조선군법회의에서 징역 1년형을 언도 받았다.

- 부평은 아직도 조병창이 할퀴고 간 상처가 깊다. 문건이 쏟아지고, 사료가 넘치지만 아직도 부평의 일본 조병창에는 애환이 서리고 서려 있다. 이 곳은 현 부평군 산곡 3동 산20 일대, 예전에는 부천군 부내면 산곡리로 불리운 곳이다. <부평사> 1권 '부천시문화유적분포지도'를 통해 조병창이 현재의 부평동 지역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개발공사로 원형을 찾기 어렵다. '정확한 위치 파악해 이후에 자료로 활용해야 한다'는 의견이 붙었다. 왜 부평에 조병창이 세워졌을까. 인천항과 경인철도를 이용한 수탈 물자 수송이 용이하고, 서울과 가까운 지리적 잇점에 분지인 부평의 지형으로 연합군의 공습을 피할 수 있었다.

/이주영 기자 leejy96@incheonilbo.com,
/자료=독립기념관
/사진제공=인천일보 자료사진, 독립기념관, 부평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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