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복 터진개 문화마당 황금가지 대표

몇 겹이었는지 정확치는 않지만 한꺼번에 뜯어내려 하니 여간 버거운 게 아니었다. 내가 태어나기 이전 시대의 일본 신문지와 만다라처럼 단순 반복적인 문양의 것부터 화려한 꽃무늬에 이르기까지. 부모님은 바른 벽지 위에 또 벽지를 그 벽지 위에 새 벽지를 덮어씌우기 하듯 벽지를 바르셨다. 천장도 마찬가지였다. 1937년에 지어져 낡았으려니와 음습한 작업장 분위기를 쇄신하는 차원에서 겉은 놔두고라도 내부 손질은 해야 할 것 같아서 천장을 떼어내려 하니, 합판처럼 단단해진 벽지는 내 몸무게를 버텨낼 정도였다.
목조 3층 일본식 주택의 내부를 죄다 뜯어내니 한 결 넓어진 느낌이었고 여러 용도로 쓸 수 있는 공간들이 확보되었다. 형님들 여럿과 부모님이 함께 오밀조밀 살 적엔 몰랐는데 10평 남짓 다다미 2층 방과 다락같은 3층 공간에서 비비적대고 있었다는 게 실감나지 않았다.

가로와 세로. 규모는 작아도 일률적으로 들보가 모양새 있게 갖춰 있는 천장을 보면, 천으로 치면 씨줄과 날줄의 균형 잡힌 조합이란 생각이 들었다. 비록 81년 묵은 고루한 집이지만 거기엔 오래 묵힌 시간들과 가족의 숨이 배어 있었다. 툭하면 때려 부수어 새집을 짓고 최신의 편리함을 쫓는 세태를 점잖게 응시하는 기백이 있는 듯했다. 인천에 부지기한 적산 가옥과 50년 이상 인생의 때가 묻은 집들이 언제 그 수명을 다 할지는 모르나, 고쳐놓고 보니 오랜 세월 감춰둔 별을 만난 것처럼 마음에 평화가 찾아들었다. 그래서 간판도 별 모양으로 만들어 보았다. 내 다음 세대에게도 추억되는 별로 남아주길 바랐기 때문이다.

홍승훈의 '인천 섬, 별을 담다' 사진전을 보았다. 인천을 연고로 삼은 섬에서 밤하늘을 봤댔자 무얼 얼마나 찍었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삼십 여 년 전, 별무리의 아우성이 침묵으로 쏟아져 흐르던 초소에서의 감흥을 평생 잊은 적 없지만, 그에 버금가는 경이가 느닷없이 소급되었다. 부모님이 잘 보지하라 전해준 집이 내 마음의 별, 일개 시민의 소박하고 추억이 담긴 별이었다면, 홍승훈이 몇날 며칠 밤이슬 맞아가며 앵글에 박아놓은 별은 그냥 별이 아니었다. 인천의 민낯이었고 원천이었다. 우주는 집이라는 표현의 장대한 의미일진데, 딱 들어맞았다. 강화 부근리 고인돌 위로 흩뿌려진 은하수, 백령도 심청각 하늘에 쏟아낸 별무리, 연평도 덕적도 대청도 소청도 선미도 굴업도 선재도 등 뭍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인천의 천장이었다.

우리는 빛의 감옥에 있는 듯했다. 낮이건 밤이건 도시가 발산해대는 빛에 정면 노출된 삶이었다. 조금이라도 어두워지면 불안해했고 대낮 같은 밤이 아니면 청맹과니처럼 어쩔 줄 몰라 했다. 별을 보려고 등불을 치켜드는 어리숙함에 길들여진 도시민이 되어버린 지금, 홍승훈은 등불의 심지를 과감하게 좌회전 시켜버렸다. 그믐밤을 쫓아다녔으며 갯바람에 살 터지는 줄 모르고 도시의 빛을 피해서 인천의 시원적 하늘을 찾아다녔던 것이다. 아마 어두워도 어둡지 않았을 것이고 홀로였어도 외롭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다. 그 동안 우리는 인천에 대해 많은 것을 보여주려 했었다. 눈으로 볼 수 있는 거라면 죄다 관광이란 목젖에 방울을 달기에 바빴었다. 세상에 주목을 받아야 살아남기 때문이었다. 좀 더 세련되어야 했고 편리와 깨끗함을 쫓아야 만이 경쟁구도에서 독자적 지위를 획득할 수 있다는 것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온정은 온데 간 데 없고 태우면 재만 남을 물리적 욕망들만 도시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아닌가 했다.

평상시 같으면 언감생심 일기장에 끄적거릴 감상평이었겠지만, 뒤통수를 두드려 맞은 듯 그 동안 잊고 살았던 좋은 기억들을 부활시켰기에 입방정을 떨 수밖에 없었다. 부모님의 유산과 인천의 섬에서 바라본 별무리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나'라는 존재의 시원이 부모님이라면, '인천 섬, 별을 담다' 사진전은 잊은 채 살았던 인천의 태곳적 공간을 생생하게 드러내 주었던 것이다. 별은 '벼르다'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벼르다'는 두 손을 비벼대는 행위 즉 기원한다는 의미이니 인천적 삶의 총체적 기원이 함축된 단어라 하겠다. 인천에서 별을 찾아낸다는 것은 축복받을 일이다. 미세먼지와 황사로 인해 더는 인천에서 청량한 하늘과 밤 별 우거진 장면을 본다는 것은, 사막에서 바늘 찾기만큼 어려운 일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혼자서 많은 시간을 쏟아내어 악조건들을 헤치고 만난 그 감동에 조금이라도 글 보탬을 하지 않는다면 의 상할 것 같아 몇 자 써 보니, 여전히 인천에도 별이 존재한다는 걸 실감했다. 인천을 만든 수없이 많은 과거들, 홀로 서 있음으로 해서 더욱 고독해진 섬, 포근히 덮고 있는 인천의 별들이 늘 그리웠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