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

 


우리 정부가 외환 위기로 국제통화기금( International Monetary Fund)에 긴금 자금을 빌린 다음해인 1998년 겨울. 우리는 국제 경제 불능 위기에 빠진 국가 국민이 겪어야 하는 경제적 고통이 어느 정도인지 절실하게 느꼈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만큼이나 춥고 힘들다. 그때는 나라 곳간이 비었다. 하지만 지금은 나라 곳간은 찼는데 국민들 주머니가 비어 가고 있다. 국민들이 느끼는 경제적 고통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IMF에 긴급자금 지원을 요청했던 1997년. 당시 나라 빚은 1500억 달러가 넘고 지금 당장 갚아야 할 돈도 있는데 가진 외화는 40억 달러에도 미치지 못했다.국제적으로 외화 지불 불능의 국가 부도 직전의 상태였다.결국 정부는 200억 달러를 빌리기로 하고 IMF에 긴급 지원을 요청했다.
일반 국민들은 나라에 돈이 없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또 돈을 갚지 못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해 12월3일 IMF는 210억 달러를 빌려줬다. 이외에 세계은행(WB)이 100억 달러, 아시아개발은행(ADB)이 40억 달러를 지원하기로 해 국제기구에서 모두 350억 달러를 빌렸다. 또 미국, 일본 등 6개국으로 부터 200억 달러 등 국제사회로 부터 모두 550억 달러를 지원 받았다.
IMF는 돈을 빌려주는 대신 민간 기업을 비롯한 사회 경제 전반에 걸친 구조조정과 외국 자본에 대한 시장 개방 등을 강도 높게 요구했다.

IMF 지원을 받아 국가 부도위기를 넘겼던 1997년 12월. 국민들은 외환 위기의 한파를 크게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이듬해 겨울 국민들은 경제주권을 빼앗긴 댓가가 얼마나 혹독한지를 몸서리치게 느껴야만 했다.
IMF에 구제 금융 신청 전 1000 까지 올랐던 종합주가지수가 1998년 5월에는 300선까지 곤두박질하고 환율은 1달러에 800~900원에서 두배 가까운 1600원대에 이르렀다. 은행 금리는 10%대에서30%대로 치솟았다.금융권에서 돈을 빌려 설비 투자에 나섰던 기업들이 무더기로 쓰러지면서 산업 현장은 대혼란에 빠졌다. 30대 대기업집단 중 16곳, 주요 은행 26곳 중 16곳이 문을 닫아야만 했다. 은행 불패의 신화가 깨졌다. 높은 이자를 감당하지 못해 망하는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들이 줄을 이었다. 1998년 한 해 동안에만 다섯 개 시중 은행을 비롯한 6만8000여개의 회사가 사라지고 100만명 넘는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고 실업자가 돼 거리로 내몰렸다. 일자리가 없어지면서 어렵게 대학을 졸업해도 일자리를 얻지 못하는 청년실업자 수가 급속하게 늘었다. 노동부 집계 결과 1997년 55만6000여명이던 실업자가 1998년 146만1000여명으로 불과 1년 사이에 3배 가까이 늘어나는 등 10가구 중 4가구는 실직이나 부도를 경험했다. 실업자 100만명 시대는 2000년 초반까지 이어졌다.
2001년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IMF의 구제 금융 자금을 다 갚으면서 비로소 IMF의 간섭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외환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중산층이 무너지고 서민 경제는 치명상을 입었다. 경제를 일으키는 성장 동력은 약화되고 현장에는 비정규직 양산의 실마리가 된 정리해고제와 파견근로제가 도입됐다. 외국 자본의 국내 은행 소유 및 경영이 가능해지는 등 외국 자본의 진입 장벽이 무너졌다.
IMF의 구제 금융체제에서 벗어난 이후에도 한 동안 한국 경제는 낮은 성장률과 높은 실업률을 보이며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종합주가지수가 외환 위기이후 1000선을 회복하기 까지에는 10년 가까운 시간이 걸리는 등 후휴증을 심하게 앓아야만 했다.

요즘 1997년 외환 위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 '국가부도의 날'이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다. 영화는 'OECD 가입, 경제 선진국 반열, 아시아의 네 마리 용' 등 온통 호황만을 알리는 지표 속에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 경제재난, 그 긴박했던 순간을 현실감 있게 담아 전 세대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경제연구기관들은 내년 경제성장률(GDP)을 비롯, 모든 경제지표가 올해보다 악화될 것이라는 분석을 내 놓고 있다. 하지만 정부는 낙관적이다. 지표는 안 좋지만 모든 경제상황이 좋아지는 방향으로 가고 있단다. 영화 속 그 때가 지금의 경제 상황과 오버랩되는 건 혼자만이 아닐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