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희 경기 동부권취재본부부장

 

정부는 1967년 서울 판자촌에 사는 127만여 명을 수도권 지역으로 이주시킬 계획을 세운다.
이어 서울 철거민 이주지의 하나로 경기 광주군 중부면(현재 성남시 수정·중원구) 일대 990만㎡을 '광주대단지'로 지정하고 55만 명을 이주시키겠다고 결정한다. 사업방식도 토지를 싸게 구입한 후 비싸게 팔아 개발비용을 충당하는 것으로 바뀐다. 광주대단지 첫 이주는 1969년 9월 시작됐다.
이주민들은 내 집도, 일자리도 가질 수 있다는 꿈에 한껏 들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곳은 하수도, 전기 등이 전혀 갖춰지지 않은 황무지나 다름없었다. 천막과 판자로 지은 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열악한 환경속에서 생활할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서울시는 분양증 전매금지와 토지대금 일시 상환 조치를 발표한다. 취득세, 재산세, 소득세 등도 부과하겠다고 했다.
이주민들은 '분양지 불하가격 시정대책위'를 꾸리고 토지가격 인하, 구호대책 마련, 세금부과 연기 등을 담은 진정서를 내며 반발한다. 그러나 정부는 이런 요구사항을 묵살한다. 이주민들은 대책위를 투쟁위로 전환한다.

투쟁위 관계자와 양택식 서울시장은 1971년 8월 10일 오전 11시 광주대단지에서 만나기로 약속한다. 양 시장은 끝내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이주민들은 격분한다. 6만여 명은 "허울 좋은 선전 말고 실업 군중 구제하라"라고 적힌 손팻말 등을 들고 시위를 벌인다. 파출소는 파괴되고 관용차, 경찰차는 불에 탄다.
양 시장은 같은 날 오후 5시쯤 이주민들의 요구사항을 수용하겠다고 한다. 100여 명이 부상하고 22명이 구속됐다.
이것이 6시간 여 만에 막을 내린 해방 이후 최초의 도시빈민운동이다. 생존·주거권 투쟁이다.
그 때 언론은 광주대단지 사건을 '폭동', '난동'으로 왜곡했다.
이 사건은 박정희 독재정권의 경제성장 위주 전략의 부산물이다. 잘못된 도시정책과 밀어붙이기식 행정도 한몫했다.

광주대단지 사건은 성남의 정체성과 뿌리를 찾을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때문에 이 사건을 다시 들추어 살펴봐야 한다.
진상이 밝혀져야 구속 피해자 명예회복도, 역사적 성격에 대한 자리매김도 가능하다.
광주대단지 사건 조명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많이 늦었지만, 다행이다.
역사학자 E.H. 카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다. 과거로부터 교훈을 얻어야 잘못된 전철을 답습하지 않을 수 있고 역사를 진보시킬 수 있는 것이다. 곱씹어 새겨볼 만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