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환 논설실장

 

지난 5일 저녁 인천 중구 항동 인천아트플랫폼. '김운경 작가가 들려주는 드라마 이야기' 특강이 열렸다. '열혈팬'을 자처해 온 터라 술을 먹다 말고 달려갔다. 자그마한 키에 첫 인상이 푸근한 초로의 한 신사가 강단에 올랐다.
▶처음부터 "저도 실은 인천 사람"이라고 털어 놓았다. 청중들 사이에서 작은 놀라움이 터져 나왔다. 대개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부산에서 태어났지만 국민학교(초등학교) 때 인천으로 왔다고 했다. 어린 시절 부평의 논둑길을 내달리던 얘기도 나왔다. 인천에서 초·중·고교(동인천고)를 나왔으니 인천에서 잔뼈가 굵었다 할 만하다.
▶그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선이 굵은 작가다. 출생의 비밀 등 막장이 난무하는 작금의 한국 드라마 풍토와는 거리가 멀다. 그를 국민작가 반열에 올린 것이 <한 지붕 세 가족>(MBC, 1988년)이다. <서울의 달>(MBC, 1994년), <옥이 이모>(SBS, 1995년), <파랑새는 있다>(KBS, 1997년), <유나의 거리>(jtbc, 2014년) 등등 손으로 꼽기가 어려울 정도다.
▶그의 작품에 재벌가나 판·검사, 의사 등 소위 잘나가는 군상들은 보이지 않는다. 세탁소집 주인(한 지붕 세 가족), 나이트클럽 제비, 무작정 상경 농촌 청년(서울의 달), 여자 소매치기, 은퇴한 조폭 두목(유나의 거리)… 1980년대부터 현재까지, 동시대를 살아 온 그늘진 삶들이 진하게 녹아 흐른다. 그는 이 날 "작품마다 발(품으)로 썼다"고 했다. <서울의 달>을 쓰기위해 서울 청파동의 무허가 댄스 교습소를 다녔고, 시골 장터 약장수를 따라 다닌 끝에 <파랑새는 있다>를 썼다는 것이다.
▶<옥이 이모>는 그의 작품 중 드문 시대극이라 할 수 있다. 19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한국 사회의 격동기를 한 여인(옥이 이모)의 인생에 투영시킨 거대한 강물같은 이야기다. 여기에는 보릿고개도, 막걸리 선거도, 10월 유신도, 사우디 건설 바람도 다 버무려져 있다. 극 중 30여 년의 세월에는 지주 집안이 셋방살이로, 그 집 머슴이 졸부로 뒤바뀌는 인생유전도 담겨있다. 김운경 작가가 직간접으로 체험한 한국 현대사회사라 할 것이다.
▶<옥이 이모> 전편을 통해 흐르는 한 음악이 있다. 독일 작곡가 오펜바흐의 첼로곡 '재클린의 눈물'이다. 재클린 뒤 프레는 20세기가 낳은 가장 위대한 여성 첼리스트였지만 42세의 나이로 요절한다. 그녀의 인생 역정 또한 옥이 이모 못지 않게 기구하다. 그래서인지 '재클린의 눈물'을 듣고 있노라면 50회 짜리 <옥이 이모> 전편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