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민 수원화성박물관장


며칠 전 SK 최태원 회장이 일가에게 1조원에 가까운 주식을 증여한다는 소식에 눈이 번쩍 띄었다. SK주식 4.7%에 해당하는 329만주를 동생 최기원 이사장, 최재원 부회장을 비롯해 사촌 형인 (고)최윤원 가족과 최신원 회장 가족 및 창업주 최종건 회장 외손자 8명에게도 주식을 나누어 준다고 한다. 다른 재벌기업들의 형제 간 분쟁을 신물나게 보아오던 터에 통 큰 증여 소식은 상큼하고 놀라운 것이 아닐 수 없었다.

현재 선경그룹 구성원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수원사람, 특히 수원 토박이들은 SK를 수원의 향토기업으로 꾸준히 응원해 왔다. 수원에서 시작해 세계적 일류기업이 되어간 사실이 곧 수원 근대사의 한 부분이자, 한국 근대사의 위대한 노정이었음을 알기 때문이다. 더욱이 올해 수원시의 '명예의 전당'에 오른 최초의 8명 가운데 최종건·최종현 형제가 포함되었다. 광복절을 앞둔 지난 8월 14일 수원시청에선 명예의 전당을 만들어 수원을 빛낸 인물을 올린 것이다.

수원의 대표적 독립운동가 김세환·이선경·임면수·김향화 선생과 독도박물관을 건립한 서지학자 이종학 선생, 군 위안부로 평화활동을 펼친 안점순 할머니와 두 형제였다. 기업인으로 수원을 대표하는 인물로 두 형제가 사이좋게 오른 것이다. 이는 선경그룹을 바라보는 수원사람들의 입장이기도 하다. 두 형제의 상보적 경영과 우애, 그리고 지역에 대한 애정과 헌신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SK는 최종건 창업자가 1953년 6·25전쟁으로 폐허로 변한 수원 평동의 선경직물을 인수하면서 시작되었다. 미군 폭격으로 폐허가 된 공장을 인수한 뒤 직원들은 5㎞ 거리의 광교천에서 자갈을 수레로 실어 나르고, 서호천의 모래를 퍼나르며 공장을 직접 지었다. 그렇게 선경그룹의 위대한 여정은 시작되었다.

미국 유학 도중 부친 별세로 귀국한 최종현은 1962년 부사장으로 형을 도왔고, 1973년 최종건 회장이 폐암으로 사망한 뒤 경영권을 아무런 잡음 없이 승계하였다. 이들 형제는 수원상공회의소 회장을 오랫동안 역임하며 지역 경제발전에도 노력하였다. 최종건의 아들 최신원 SK네트웍스 회장이 얼마 전 수원상공회의소 회장을 맡은 이유도 이러한 선대 유업을 알아서였고, 지역에 대한 헌신임을 알고 있다. SK가 수원에 쏟은 애정도 다른 어떤 기업과 다른 모습이다. 성안 신풍동에 수원의 대표 도서관인 선경도서관을 건립하여 기증하였고, 정자동에 대형 공연장 SK아트리움을 기증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정 수원사람들이 SK에 바라는 것은 근본에 충실한 글로벌 경영이다. 그것은 회사 경영도 마찬가지지만 회사의 역사에 대한 근본적 충실함을 보고 싶은 것이다. SK를 이끄는 수성 최씨는 수원(수성)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이다. 1000년 가까운 역사를 수원을 비롯한 화성과 평택지역에 근거지를 두고 살아왔다. 수원을 본관으로 하는 수원 백씨와 수원 김씨, 수원 최씨 등이 있지만 실상 수원에는 많지 않다. 그러나 수성 최씨는 수원지역을 근거로 오랫동안 세거해왔고 수원을 빼고는 설명할 수 없을 정도이다. 수성 최씨인 SK일가는 중시조 묘를 비롯해 조상의 묘가 이곳에 있고, 평동에는 최종건·최종현이 태어난 생가가 잘 보존되어 있다.

따라서 몇 백년 역사가 있는 조상 땅에서 시작한 기업체로 세계적 일류기업으로 성장한 역사와 이야기는 감동적인 문화자산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오랫동안 수원사람들은 SK의 뿌리인 선경직물 공장을 활용한 문화시설을 만들기를 희망해왔다. 수성 최씨 일가의 우애 깊은 사업경영의 텃밭이자, 한국 산업발달사의 또 다른 요람이어서다. 동시에 수원에서 세계로 나아간 한국인들의 위대한 꿈을 보여줄 수 있는 역사적 현장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빨간벽돌의 전형적 공장건물은 이웃 일본의 나고야 도요타 산업기술기념관 또는 영국 화력발전소를 미술관으로 만든 테이트 모던 갤러리(Tate Modern Gallery)를 생각하며 또 다른 멋진 명소를 기대해왔다. 그러나 SK는 직물공장이 폐쇄된 지 십수 년을 방치하다가 대형마트를 지으려 시도하고 다시 대형 중고자동차 매매센터를 건립하는 것으로 결정되어 진행 중이다.

세계적 기업으로 나가려면 문화와 역사를 아는 기업이어야만 한다. SK가 걸어온 길을 보여 줄 수 있는 가장 적당한 공간인 수원 평동 선경직물 자리에 자료관이든, 산업관이든, 박물관이든 제대로 건립하여 운영해야 한다. 가난한 마을 평동 벌판에서 패기와 틀을 깨는 큰 꿈을 꾸었던 그들을 만날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위대한 역사를 만든 사람들과 함께. 이제 SK 창립 70주년을 맞이하는 2023년, 그 아름다운 꿈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