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하대 명예교수

 

봄은 피부로 오고 여름은 입으로 온다. 가을이 눈으로 온다면 겨울은 움츠린 목과 어깨로 오는 듯싶다. 어부들은 걷어올린 그믈에서 퍼득거리는 전어를 보면서, 사람들은 점점 멀어지는 높은 하늘이 엷은 코발트색으로 변하는 모습에서 가을을 느낀다. 그리고 이어지는 인천 강화, 충남 서천, 전남 광양, 경남 삼천포 등 전국 각지 어촌의 '전어 축제' 홍보를 보면서 가을 정취에 젖는다.

누구나 흔들리게 만드는 계절인 가을, 특히 오감이 호강하는 만추에 접어들면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저절로 낸다. 각자 떠올리는 장면과 생각도 모두 제각각이다. 그래서 저마다 '가을동화'는 개성미 넘친다. 특별히 비 내린 후 늦가을 정취를 맛보기 위해 역사의 보고(寶庫)인 강화도의 마리산을 찾는 마음은 남다르다. 2년 전 '무궁화 동산, 화려한 꽃일수록 독이 많은 법'이라는 에세이 집필 계획을 세운 곳(참성단)에, 이제 마지막 탈고를 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다시 찾는 산행이기 때문이다. 우선 백두산과 한라산 중간 지점에 위치한 민족의 영산에 대헤 강화인들의 자긍심은 각별하다. 그래서 마리산 입구에 들어설 때마다 경건한 마음을 갖고, 캐나다 개 썰매장 '밴프(Banff)' 관리자가 안내한 내용을 떠올리게 된다. 즉, "개썰매가 출발할 때는 '가자'라고 외치고 곧이어 '훌륭하다'라고 소를 질러 격려하는 게 원칙이다. 이어 개 이름과 '와우와우(WOW WOW)'를 연발하면서 흥분시키고 칭찬과 격려를 계속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따라서 나무 이름을 불러주고 칭찬하면서 산을 찾아야 하는 게 등산인의 '에티켓'이라고 생각한다.

가을 산은 등산객에게 '오감'을 호강시켜서 모두에 감탄하고 고마움을 느끼게 한다. 피로한 심신을 활기로 재충전하는 마력을 지닌 것 같다. 산 입구에 들어서며 손가락으로 네모를 만들자 모두 황홀한 산수화다. 눈에는 수채화를 연상케 하는 나무들의 모습이 들어오고, 귀에는 물소리와 새들의 이중창, 코로는 온갖 수목들의 냄새가 풍성하게 밀고 들어온다. 가을 산에서 빠져 나오기란 쉽지 않다. 눈은 180도 회전하면서도 발걸음은 직진과 좌우회전만 허용할 뿐, 후진을 허용하지 않는 게 산행 질서이기 때문이다. 순간 잠들어 있던 감수성이 살며시 눈을 뜨기에 아래를 내려다 보니 야생화도 그렇게 예쁘고 정겨울 수 없다. 가을 향기를 흡입하니 저절로 등산중독 예찬론자가 되려고 한다.

가을 산은 개성의 요람이요 다양성의 경연장이기도 하다. 갈색 참나무와 붉은 색 단풍나무, 진초록 잣나무와 솔향 짙은 소나무 숲을 벗어나니 황금빛 억새밭이 반겨준다. 지상에서는 햇빛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했고, 땅속 뿌리는 물줄기를 찾아 최선을 다했다. 큰 키의 교목(喬木)과 작은 키의 관목(灌木), 그리고 덩굴나무는 자기 정체성을 나타내며 선의의 경쟁을 하면서도 멋지게 공생하고 순리대로 삶의 질을 표출한다. 이 산 속 고품질 문화에서 저질의 인간들은 느끼고 배워야 한다. 산 관리인이 바뀔 때마다 싫어하는 나무들을 다 베어내면, 산의 모습은 어찌 될라나 생각을 해보란 말이다.

주변을 보니 두 그루 나무가 눈길을 끈다. 한 나무는 성질이 급한지, 아니면 발빠르게 겨울 준비를 하는 것인지, 벌써 물들일 잎새 하나 없이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목(裸木)이다. 그 나무에서 인고(忍苦)의 계절 앞에 은인자중(隱忍自重)하는 겸손한 모습과 의연함을 느끼게 된다. 또 다른 나무는 수명을 다해 고사목(枯死木)이다. 다가가 보니 송담과 칡 등 넝쿨식물에 의해 죽임을 당한 숙주(宿主) 나무였다. 산주가 똑똑했다면 송담과 칡넝쿨 뿌리를 도려냈거나 옆에 등나무를 심어 칡넝쿨을 제압했을 터인데 안타깝다. 등나무는 칡넝쿨과는 반대로 왼쪽 방향으로 감아 올라가 칡넝쿨을 안고 햇빛도 차단해 고사케 하기 때문이다.

산 정상 참성단에 오르니 주말이어서인지 사람들이 무척 많다. 두 제자를 만나 어울렸다. 그런데 서로 인사가 끝나기 무섭게 정치 얘기를 꺼낸다. 그래서 "이 아름답고 신성한 데 와서 더러운 정치 얘기를 하지 말자. 만추에 대한 느낌을 각자 한 마디씩 하자."며 화제를 돌렸다. 하지만 그 예찬은 아주 빈곤하다. 그래서 이번에는 "간단히 영어로 표현해 보자"고 했더니, '맑고 깨끗한 날(fine day)' '좋은 날(good day)' '멋진 날(nice day)'이란 말뿐이다. 20~30대 발랄한 남녀들이라면 다양한 표현(happy day, perfect day, beautiful day, awesome day, fantastic day 등)이 있는 데도 말이다. 언어교육이 문제이고 흑백사고의 사회 분위기가 문제라는 생각이다. 언제쯤 개성과 다양성이 빛을 보는 선진국 사회로 갈 것인지 발걸음이 무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