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봉래 인천대 중어중국학과

 

중국에서 유학하던 시절 세계 각국에서 온 유학생들과 어울리면서 매우 흥미로운 현상 하나를 발견했다. 서로 중국어로 대화를 나누지만, 출신 국가별로 특히 사용 빈도가 높은 어휘나 표현들이 따로 있더라는 것이다. 예컨대 한국 학생들은 정도를 나타내는 부사로 '타이(太)'를 많이 사용하는데, '매우' '아주'보다는 '너무'라는 뉘앙스가 강하다. 우리 일상 언어생활에서 "너무 좋다", "너무 예쁘다"라는 표현을 자주 쓰기 때문인 것 같다.

일본 유학생의 경우 시도 때도 없이 "뚜이뿌치(對不起)", 즉 "미안합니다"라는 말을 남발한다. 딱히 미안해야 할 상황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 역시 민폐를 끼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는 일본인이 미안할 때나, 양해를 구할 때나, 부탁할 때 언제나 "스미마셍(すみません)"이라는 말을 앞에 붙이는 언어 습관 때문일 것이다. "스미마셍"의 여러 의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의미를 지닌 중국어 "뚜이뿌치"를 맥락 없이 남용하게 된 것이다.

미국을 비롯한 영어권 학생들이 뭔가 불만스러울 때 가장 많이 쓰는 말은 "뿌꽁핑(不公平)"이었다. 한자 그대로 "불공평해!"라는 의미인데, 이 역시 "It's not fair"라는 말을 중국어로 번역하여 사용하는 것이다. 사실 영어권에서 살아 본 적이 없어서 그들이 이 표현을 얼마나 자주 쓰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적어도 우리나라나 중국, 혹은 일본 학생들이 뭔가 불만스러운 상황에서는 거의 쓰지 않는 표현이다. 이런 현상을 보면서 우리나라나 일본, 그리고 중국에서는 일상생활에서 벌어지는 불공정한 상황을 매우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 일이 있다. 개인의 당연한 권리를 내세우는 일이 마치 전체의 화목을 깨는 부도덕처럼 여겨지는 문화에서 기인한 것이 아닐까?

그러나 이런 동아시아권 문화도 젊은 층을 중심으로 조금씩 변해가고 있는 듯싶다. 지난 평창 올림픽에서 여자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 이야기가 나왔을 때 인터넷의 각종 게시판에서 이를 비판하는 글들이 쇄도했는데, 특히 이 일을 가장 민감하게 받아들인 사람들은 10대 20대 젊은 층이었다.
이에 대해 혹자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면서 자라난 중년세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이들은 통일에 대한 감수성이 낮기 때문이라는 말도 한다. 이 역시 일리 있는 말이지만 젊은이들과 늘 얼굴을 맞대는 동료 교수들과 이야기를 나누어보면 문제의 핵심은 '공정'에 있다는 의견이 주를 이루었다.

내가 아무리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 노력해도 결국에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또래들에게 공정한 내 기회가 박탈당할 수밖에 없다는 평소의 인식이 이 일을 계기로 한꺼번에 폭발한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 대해 책임을 느껴야 하는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 정말 낯을 들기 어렵다. 그래도 우리 젊은이들은 이후 성적과 무관하게 여자아이스하키 단일팀이 대회를 치르는 동안 보여준 팀웍과 투지에 칭찬하고 즐거워했다. 이러한 점은 오히려 우리 기성세대가 배워야 할 대목이 아닌가 생각된다.
공정에 대한 또 다른 단상 하나를 덧붙이려 한다. 1950년대 중후반부터 중국공산당은 농업을 집단화하기 시작했는데, 그 과정에서 생겨날 부작용을 우려하여 여전히 '노동에 따른 분배' 원칙을 고수하도록 지침을 내렸다고 한다.

그러나 서둘러 사회주의를 완성하겠다는 극좌사조 흐름 속에 정작 일선에서는 이 원칙을 저버리고 분배에서 사실상 '절대평등주의'로 치달았다. 결국 농민들의 노동의욕을 급감시켜 중국은 50년대 말 전국적인 식량부족으로 인해 대재앙을 맞는다. 그것이 바로 사회주의 한계이자 실패 원인이 아니겠느냐고 하는 분도 계실 것이다.
분배문제에서 인간의 적극성을 끌어낼 방법을 고려하지 못한 점은 물론 성급하고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 하나 내가 열심히 일하거나 게으름을 부리거나 똑같이 분배를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외형적인 평등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불공정하다는 감정을 느끼게 만들어 전체 사회를 위험에 빠뜨렸다면, 마찬가지로 내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공정한 대우를 받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 역시 인간의 적극성을 끌어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사회를 더 위험하게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논어 계씨편에 나오는 "다스리는 사람은 적은 것을 걱정하지 말고 고르지 못한 것을 걱정하라(有國有家者 不患寡而 患不均)"는 공자의 가르침이 사회생산력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던 옛 사람의 입바른 소리가 아니라, 인간의 본질적 희구(希求)를 꿰뚫은 통찰이라는 생각이 든다. 고르다는 것은 기계적이고 물질적인 균등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회와 희망의 균등이어야 한다.